타이동
이런 게 즉흥여행의 맛인가?
어제 타이동을 돌아보고는 완전 반해버렸다. 특히나 숙소를 잡은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든다. 사람도 별로 없고 온통 개인주택에다가 걸으며 집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예쁜 주택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타이중은 고층 건물이 많고 주상복합 같은 고급 맨션이 많았는데, 여기는 대부분 2~3층의 단독주택들이 많다. 대만 동쪽에 지진이 꽤 난다고 들었는데 (확실하진 않다) 그래서 일 수도 있겠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로비로 나오니 해가 쨍쨍하다. 해가 비치니 뷰가 더 예쁘다. 와아. 잠시 감탄하다가 숙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셨다. 커피머신은 드롱기. 좋다. 음. 대만에서 마신 아메리카노 중에 제일 맛있다. 여기서 며칠 더 묵고 싶은데 주말이라 그런지 이미 예약이 꽉 찼단다. 할 수 없이 주변에 다른 숙소를 구했다. 이 정도 가격에 1인실을 쓸 수 있는 곳은 없고 여성 전용 도미토리가 있는 숙소가 있어 2박을 예약했다. 걸어서 3분 거리. 아침 산책으로 동네도 돌아보고 이따가 갈 숙소 위치도 확인하기로 했다.
아침 9시인데도 벌써 해가 뜨겁다. 긴팔을 입고 나오길 잘했다. 한적한 도로. 주변을 살펴보니 온통 산이다. 뒤에도 산, 멀리 보이는 것도 산. 그냥 거리를 걷기만 해도 좋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길가는 온통 풀내음이다. 뜨거운 풀냄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냄새를 좋아한다. 일단 옮길 숙소 위치부터 확인하자. 구글맵을 보며 찾아간 숙소는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체크아웃이 11시이니 옮길 숙소에서 짐을 맡아주지 않으면 골치 아프게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인분이 상주하시는 모양이다. 안심하고 동네를 발가는 대로 돌아다녔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짐도 싸야 하는데. 후다닥 들어가 11시 딱 맞춰 체크아웃을 했다. 방을 나서며 방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루 잘 묵었다. 고마워. 타이동에 오면 또 여기에 머물고 싶다.
새로운 숙소는 도미토리임에도 아주 넓고 쾌적했다. 11시에 숙소에 들어선 나에게 짐만 내려놓고 나가라 할 법도 한데 주인아주머니께서는 환하게 맞아주셨다. 침대도 이미 준비되어 있어 바로 방을 안내받았다. 화장만 안 했어도 그냥 드러누워버리는 건데. 대충 짐을 풀고 시내 나가는 버스 시간을 찾아보았다. 다음 버스까지는 40분 정도 남았으니 기차역 세븐일레븐에 들러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면 될 것 같다.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게, 오늘 하루 출발이 좋다.
밥을 먹고 싶어 고른 메뉴. 기대 안 했는데 마키가 굉장히 맛있었다. 밥이 퍽퍽할 줄 알았는데 부드러워 놀랐다. 앞으로 종종 사 먹어야겠다. 그리고 밥만 먹기 아쉬워 디저트도 하나. 사실 푸딩은 가격이 20위안인 줄 알고 싸서 집었는데 계산할 때 보니 사십몇 위안이었다. 마키가 49위안이었나 그랬으니 밥 값과 맞먹는 가격이다. 그래도 푸딩도 맛있게 잘 먹었다. 밥을 먹고 치우니 딱 버스시간이 되어 정류장으로 갔다. 오늘 목적지는 타이동 삼림공원이다. 그런데 도착한 버스가 버스터미널엔 가는 것 같은데 삼림공원에는 가는지는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타자. 아무 버스나 타고 한 바퀴 도는 걸 좋아하는지라 될 대로 돼라, 하며 버스에 올랐다.
역시 이 버스는 내가 가려던 곳과 반대로 가는 버스였다. (덕분에 버스 투어 잘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다행히 버스터미널이 종점인 버스라, 기사님께 삼림공원에 가고 싶다 하니 앞에 대어져 있는 버스를 타란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앞 버스에 올랐다.
타이동 삼림공원 도착시간 12시 52분. 대낮에 그늘막 하나 없는 공원에 오는 건 미친 짓이다. 그것도 걸어 다닐 거라면. 그래도 미친 짓만큼 재밌는 게 없다. 소나기가 내릴 줄 알고 챙겨 온 우산을 양산 삼아 쓰고 다녔다. 다행이다. 우산이 없었다면 살이 녹아내렸을 거다.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드니 땀이 줄줄 나지만 그래도 피부가 따갑지는 않았다. 조금 걷다가 나무 밑 의자에 드러누웠다. 아, 좋다. 타이동은 한량들이 살기 딱 좋은 곳이다.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보니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 문득 뤼다오에서 스쿠터를 타다 넘어진 건 타이동에 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타이동은 뤼다오를 가기 위해 거치는 도시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었고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대만 최애 도시가 돼버린 것이다. 이제까지의 대만 여행이 재미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여행 내내 즐겁다기보단 해야 할 일을 처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가고 싶어서 간 것도 물론 맞지만, (일정을 짜놓아서) 가야 하기 때문에 갔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뤼다오 이후로 일정을 짜지 않은 것은 컨딩 호스텔에서 만난 한 외국인 친구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관광지에서 본 친구가 도미토리로 들어오길래 너무 놀라 '너 좀 전에 거기 있지 않았어?' 하고 물으니 맞단다. 서로 신기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중 내가 컨딩 다음에 어디를 가냐 물으니 외국인 친구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직 모르겠다 말했다. 타이난에 가볼 생각이긴 한데 어차피 가오슝을 들러야 하니 가오슝을 구경하고 갈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내게 가오슝을 가보았냐 묻길래 가보았다고, 개인적으로는 타이난보다는 가오슝이 좋았다 말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던 중, 내가 여행 계획을 아직 정해놓지 않은 거냐 다시 물었다. 친구가 이상하다는 듯 웃으며 나를 본다.
'It's vacation!'
베트남에서 교환학생으로 마케팅을 공부하며 방학을 맞아 대만 여행 중인 벨기에에서 온 친구. 그 친구의 한 마디에 잠시 머리가 딩, 울렸다. 그래. 나도 휴가였지. 그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만 지내며 이동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결정은 가보고 나서. 컨딩에서도 어디 어디 가봤냐 물으니 딱 두 곳을 꼽았다. 그리곤 내일 떠난다 했다. 미련은 없어 보였다. 저 확고한 호불호가 부러웠다.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이야기하려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좋으면 가고, 아니면 패스. 그래. 내가 원했던 게 저 중심이었는데.
그리고 그 친구와 컨딩에서 아침 8시 첫 버스를 타고 함께 떠났다. 나는 팡 리아오역에서 하차, 그 친구는 가오슝까지 갔을 테다. 먼저 내리는 나를 보며 'Have a nice trip!'을 외치던 친구. 스치는 인연도 즐겁고 소중한 것임을, 이번 여행으로 많이 배운다. 그 친구 덕에 타이동 여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이제야 정말로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해야 하니까, 가야 하니까 하는 여행이 아닌, 좋아서 여기에 머물고, 좋아서 걷는 그런 여행.
이곳은 나에게 힐링 그 자체인 곳이다. 실제로 오늘 공원을 돌아다니며 마음속 무언가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 들으며 걸어 다녔다. 유아의 숲의 아이.
노래를 들으며 나무 사이를 거니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눈물이 나길래, 그냥 울었다. 햇볕 밑에서 요거트만 퍼먹으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유튜브 영상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 것과 비슷한 종류의 위안이랄까. 잘 찾아왔구나, 하는 안도감. 이래도 괜찮다는 스스로의 인정.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극 P인 내가 J 흉내 내다가는 도무지 행복해지지 못할 것 같다. 반대도 마찬가지.
이제 난 가장 나 다운 게 무엇인지 알겠어
잘 알겠어
이 가사가 나올 때 눈물이 주룩 흘렀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여행인가 보다. 넘어지고 헤매다가 이제야 중심을 잡은 기분이다. 그래.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여행이 아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다. 뤼다오에서 만난 룸메이트 캐롤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던. 그 자연스러움. 그것이 그녀를 빛나게 했다.
스치는 인연들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답게 행동하자, 가장 행복한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