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처음 이 글을 쓸 당시.
아직 밖인데 대만 시간으론 10시 49분, 한국 시간으론 11시 49분을 지나고 있었다. 매일 글을 쓰기로 했기에 한국 시간에 맞춰 글을 올리려 했는데 오늘은 오후 늦게부터 활동을 해서 그런지 식사 때를 놓쳤다.
오늘은 노천탕과 Chiang Kai Shek 치앙카이섹, 그리고 야시장엘 갔다.
어제는 (다행히) 정말 잘 잤다.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들기도 했고, 등산으로 몸을 썼더니 확실히 깊게 잘 수 있었다. 다만 한번 뒤집어진 피부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온천. 전에 타이베이에 왔을 때 물이 굉장히 좋아서 또 오고 싶다, 생각했던 천탕 川湯에 가보기로 했다.
잘 자기는 했지만 잠이 부족한지 아침을 먹고 또 졸려 낮잠을 자고 출발했다. 3시쯤 준비하고 꽤 먼 거리라 지하철을 탄 뒤 버스로 환승해서 가야 하는 곳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더하고 나니 거의 5시쯤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구글맵이 알려주는 대로 걸어가다 찍은 사진. 전에는 캄캄한 밤에 와서 몰랐는데 이 주변이 다 산이다. 자세히 보면 돌 사이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저게 다 유황온천인 듯하다. 계단은 있지만 출입구가 막혀있어 올라가지는 못했다. 계란 삶는 냄새가 풍겼다.
지도를 따라 목적지에 다 왔는데 길이 막혀있다. 써져 있는 표지판을 찍어 번역기를 돌려보니 공사 중이니 다른 길로 가란다. 저긴데. 저기가 맞는데. 고지가 코앞인데 길이 뚝 끊겼다.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심정이란. 공사 중인 곳으로 지나가고 싶었지만 문을 꽁꽁 묶어놓았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해서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갔다. 왔던 길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었는데.
중국어 못하는 게 이럴 때 서럽다. 분명 여기까지 걸어오기 전에 뭐라 뭐라 쓰인 표지판이 보였다. 그게 이 뜻이었다니.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가 보다. 까막눈이 되니 미리 알면 아낄 수 있는 걸음을 언제나 낭비하게 된다. 그래도 갈 수 있는 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천탕 입구. 전에 왔던 곳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나는 변해도 나머지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그런 욕심쟁이 심보다.
천탕은 양명산에 있는 온천인데, 대중 온천으로 우리나라 목욕탕과 이용방식이 똑같다. 때를 밀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그리고 수건도 주지 않는데, 대신 샴푸와 바디워시는 구비되어 있다. 몸을 씻는 좌석이 5개밖에 되지 않는데 어차피 때를 밀지 않기 때문에 좌석이 꽉 찼다가도 금방 비워진다.
가격은 250위안. 돈을 내면 헤어캡을 주는데 탕에 들어갈 땐 꼭 써야 한다. 내부는 일본 느낌이 물씬 난다. 처음 왔을 때는 밤이었어서 저 홍등을 보고 지우펀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니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대부분 대만분들인 듯했다. 일단 탈의를 하고 들어갈 준비를 했다. 비치된 샴푸와 바디워시로 머리와 몸을 깨끗이 하고 샤워캡까지 썼다. 준비완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제일 뜨거운 탕부터 들어갔다.
물이 에메랄드 색에다가 뽀얗다. 뜨거운 온천물이 탕으로 계속 콸콸 쏟아졌다. 그래서인지 물 온도가 절대 식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흐리고 비가 몇 방울씩 떨어져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말이다. 몸을 담그고 있다가 너무 뜨겁다 싶으면 얼른 나와 잠시 몸을 식혔다. 탕 위에 지붕이 반 정도만 있는데, 나머지 뚫린 반으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도 했다. 산 중간에 있는 온천이라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계속 탕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잠시 앉아 있다가 물을 마시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와 세워둔 '미끄러우니 조심' 표지판도 넘어트리고. 천방지축 까마귀는 보는 재미가 있었다.
탕은 3개, 그리고 사우나가 1개 있었다. 탕은 뜨거운 탕, 미지근한 탕, 그리고 차가운 물이 있는 탕으로 나뉘어 있었고 사우나가 1개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이용하지 못했던 사우나와 미지근한 탕에도 들어가 보았다. 차가운 건 싫어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우나는 문을 열자마자 허연 김이 덮쳐왔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사람이 있는지는 가까이 가야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사우나를 즐기려는데 앉는 자리에서도 김이 올라왔다. 손을 대보니 부분 부분 매우 뜨겁다. 무서워서 앉지 않고 서서 했다.
사우나도 들어갔다가 미지근한 탕에도 들어갔다. 우리나라처럼 버튼을 누르면 수압으로 마사지하는 기능이 있었다. 내가 탕에 들어오자 한 아주머니가 해보라며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셨다. 대충 눈치로는 알겠는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웃기만 하니 그제야 대만 사람이 아닌 걸 아셨나 보다. 손으로 말하는 제스처를 해 보이 신다. 내가 고개를 저으니 영어로 코리안? 하셨다. 영어로 예스, 대답 하자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말을 걸어오시는 아주머니. 영어를 너무 잘하신다며,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냐 물으니 대학교에서 배웠고 교회를 다니는 데 교회에서 무슨 활동을 하시며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셔서 그렇다 하셨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조금만 걸어도 불교 사원이 천지인 이곳에서 어떻게 교회를 다니시게 되었냐 여쭤보았다.
Yes. There are many temples here. More than 7/11!
(그래. 대만에는 사원이 많이 있어. 세븐일레븐보다 더 많아!)
저 대답에 빵 터졌다. 모얼 댄 세븐일레븐! 에서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덕분에 아주머니도 나도 한바탕 웃었다. 대만은 세븐일레븐의 나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븐일레븐이 많다. 그래도 타이베이로 올라오니 패밀리마트(이마저도 일본 기업이지만)가 더 많이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지방은 정말 세븐일레븐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 세븐일레븐 보다 많은 게 불교 사원이라니 말 다했다. 아주머니는 기독교 재단 대학교를 다니며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그렇게 교회에 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사실 대만 크리스천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만나보는 거라 매우 신기했다. 인구의 몇 프로정도나 되냐 물으니 5% 정도라 하셨다. 내가 그 5%의 사람을 오늘 이 노천탕에서 만나다니.
아주머니는 정말 유쾌하신 분이었다. 드립 치시는 솜씨가 남다르셔서 나이 불문하고 누구와도 친해지실 수 있는 분 같았다. 한국 친구분들도 있으셔서 한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계신 듯했다. 다행이다. 서로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2시간 여의 온천을 마치고 나오니 밖은 이미 캄캄하다. 아주머니와는 온천을 나갈 때까지 인사하며 헤어졌다. 그녀의 마지막 인사는 '씨유 인 헤븐!'. 역시 예사롭지 않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 라며 쿨하게 떠나셨다. 그래. 이 분과 언제 지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늘에서 만날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버스를 타러 나오는데 빗방울이 조금 굵게 떨어지고 있었다. 챙겨 온 모자를 쓰고 바람막이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오늘은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아 속으로 더 내리지 말기를 빌었다. 다행히 비는 거기서 멈추었다. 타이베이는 비가 크게 쏟아지지는 않지만 절대로 그치지는 않는다. 언제든 내리고, 언제든 그친다. 그 덕에 대만 사람인지 (특히 타이베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두 가지를 터득했는데 하나는 가방에 개인 물병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지를 보는 것이다. 특히 백팩에 이 둘을 꽂고 다니는 사람은 확실하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와 가까운 지하철 역 주변에서 내렸다. Shipai역이었는데, 주변에 야시장이 있길래 허기가 져 급한 불을 달랠 겸 구경을 했다. 그리고 만두 하나 사 먹고 음료도 하나 사 먹고 대만 친구 캐롤이 추천해 준 치앙 카이 섹을 들렀다가 숙소로 가기로 했다.
처음엔 이곳이 치앙카이섹인 줄 알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것이 꼭 그 이름과 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곳은 National Theater 국립 극장이었다.
이곳이 치앙카이섹 Chiang Kai-shek. 이미 늦은 시각이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있었다. 그래도 주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건물이 높고 매우 컸는데, 그것이 주는 위용이 있었다.
한 바퀴 크게 돌고 이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려 검색하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가면 3~40분 정도, 걸어가면 50분 정도 걸린다고 나온다. 50분 정도면 걸을만하다. 오늘 하루종일 몸 쓴 일이 없어 걸어가기로 했다.
한 밤중에 도로를 걸으니 꽤 기분이 좋다. 쌩쌩 달리는 차와 오토바이 옆으로 걸어가는 내가 이상했던지 오토바이를 탄 한 청년이 지나가다 나를 훽 돌아본다. 그러다가 사고 나요. 앞만 보세요 앞만.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크게 따라 불렀다. 노래방이 따로 없다. 크게 노래를 부르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그렇게 걸어서 숙소에 도착. 가방만 두고 다시 나와 야시장으로 걸었다. 만두 하나로는 속이 허해서 야시장에서 선짓국 같은 것을 팔길래 도전해 보았다.
이 사진을 보고 시켰는데, 나온 음식을 먹어보니 내가 먹었던 선지와 식감이 좀 달랐다. 선지는 좀 더 단단하고 씹을 거리가 있었다면 이건 더 부드럽고, 짜다. 그리고 냄새도 좀 다른 것 같고. 그제야 파파고 번역기를 돌려보니 오리 피란다.
그래도 얼큰한 것이 먹고 싶던 차에 맛있게 잘 먹었다. 야채는 다 건져먹고 오리 피는 몇 개 남겼다. 그래도 내 입맛엔 선지가 더 맛있다. 메뉴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온 지 몇 분 되지 않아 브런치에 글을 올릴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수정할 것임을 알리는 글을 올려놓았다. 그 마저도 갑자기 인터넷이 느려져 조마조마하며 업로드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야시장에는 아직도 사람이 가득하다. 대체 이 사람들은 몇 시까지 먹는 거지? 우리는 잘 밤에 뭘 먹냐 할 텐데 대만 사람들은 자기 직전까지 먹는 듯하다. 11시가 다 된 시간까지 저렇게 음식점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그리고 집에 가는 사람들 손에 음식 포장 한 개쯤은 모두 들려있다. 이렇게 늦게 먹는데도 몸매를 유지하는 걸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숙소에 오자마자 노트북으로 글을 썼다. 오늘 늦게까지 자서 안 피곤 할 줄 알았는데 조금씩 잠이 온다. 얼른 물로만 대충 씻고 자야겠다. 그나저나 얼굴에 뭐가 더 올라왔다. 모낭염인지 여드름인지 왼쪽에만 올라오던 게 오른쪽에도 번졌다. 다른 지역에선 한 번도 나지 않던 트러블이 타이베이에 오자마자 미친 듯이 올라오니 정말 물이나 공기가 안 좋긴 한 듯하다. 가장 걱정했던 뤼다오 숙소에서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한국에 가면 일단 피부과부터 가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