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by 서리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노래 가사는 폰트를 바꾸어 표현하였습니다.)

28829_1667975436.jpg © A24, AGBO Production, Hotdog Hands

 사람들과 노래방을 가면 꼭 다 같이 열창하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가수 g.o.d.의 노래 <길>이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를 한 목소리로 부르다가 그만 서글퍼져 분위기를 망치는 일도 더러 있었다면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길>이 국민 히트곡이 된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 가사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다른 길을 선택한 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길을 걷는 나는 어떤지 만나볼 수 있다면 어떨까?



28829_1667975446.jpg © A24, AGBO Production, Hotdog Hands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멀티버스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우주는 그 경우의 수만큼 갈라진다. 갈라진 우주는 각자의 시간선을 달리며 점점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며, 또 다른 우주들을 무한히 만들어낸다. 비록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너절한 코인 세탁소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수많은 영수증과 싸우고 있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레드카펫에 오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의 의식으로 무한한 다중 우주 속 어떤 자신(들)에게든 동시에 접속할 수 있게 된 존재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조부 투바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되어본 조부는 마침내 생각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선택지를 다 고를 수 있다는 말은 곧 그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내 앞에 있는 게 영수증이든 레드카펫이든 다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모든 것을 베이글 위에 올렸더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낫씽, 노웨어, 낫앳올이 되었다. 이 베이글은 마치 모든 것을 0으로 되돌리는 붕괴와 멸망의 블랙홀처럼 보이지만, 조부에게는 일체의 번뇌가 모두 사라진 영원한 평안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조부는 갑자기 망설인다. 마침내 아무것도 선택할 필요 없는 돌이 되더라도, 꼭 누군가가 거기 함께 있어줘야 할 것만 같다. 아무 의미 없는 수많은 우주 가운데서도 왠지 그 한 우주의 그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베이글로부터 전 우주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알파버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부보다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고자 멀티버스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찾아낸 사람은 항상 최악의 선택만을 해온 에블린, 가장 별볼 일 없는 에블린이다.



28829_1667974988.jpg © A24, AGBO Production, Hotdog Hands

영화는 마치 모든 것을 올려 둔 베이글처럼 영화 전체를 맥시멈으로 가득 채움으로써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왜 하필 (레즈비언 딸을 둔 동양인 이민자 중년 여성)에블린인가’같은 의문이 들더라도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조부와 에블린을 따라가며 쇼킹할 정도로 화려하고 멀미 날 정도로 휙휙 바뀌는 시각 자극에 정신을 빼앗기고 나면 별로 생각나지 않게 된다. 전 우주의 소멸인지 안식인지를 건 필사의 결투가 숨 넘어가게 웃긴 이유도 철학적인 논쟁이 이 영화의 주된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영화는 없었다. 이것은 코미디인가, 액션인가, SF인가, 가족영화인가. 아니면… 종교영화인가?(베이글교가 될 것인가, 눈알교가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관객 멱살을 잡고 여기저기 패대기를 치던 영화는 설마설마 했으나 사랑(다정함)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디즈니식 결말을 뻔뻔하게 내 놓는다. 약간 속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저항없이 울 수 있는 건 이미 영화적 경험으로 가능한 모든 즐거움을 충분히 누린 뒤여서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도 한 몫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온갖 현란하고 괴상망측한 분장 너머로 언뜻 지나가는 조부의 곧 울 것 같은 얼굴은 돌이 되면 누릴 수 있다는 영원한 평안에 던지는 의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정말로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수십명의 에블린을 다 보고 나서 ‘(그 모든 사람이 다 될 수 있었지만)난 너와 여기 있고 싶어!’를 외치는 ‘엄마’ 에블린의 얼굴을 다시 보면 또 어떻게 설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8829_1667975544.jpg © A24, AGBO Production, Hotdog Hands

그러나 SF 판타지다운 비주얼 쇼크에도, 배꼽 잡는 B급 코미디와 쿵푸액션에도, 배우들의 다채로운 얼굴과 연기력에도 눈알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하는 수 없이 '라따구리'라도 떠올려보자고 해야겠다. 남편과 딸에게 ‘라따뚜이(쥐가 요리를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제목)’를 설명하고 싶었던 에블린은 쥐와 너구리를 혼동해 ‘라따구리’라는 말실수를 하고, 남편과 딸은 그의 말실수에 폭소한다. 그러나 사실 어느 우주에는 진짜 요리하는 너구리 ‘라따구리’가 살고 있고, 그 우주에서 그것은 결코 우습지 않다. 라따뚜이가 아닌 라따구리만이 그 순간 그 우주의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부처럼 모든 곳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없어서, 지금 여기 딱 하나의 우주에 도달했다. 그렇다, 어쩌면 이 우주도 누군가의 멍청한 말실수 비슷한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말도 안 되고 우스꽝스러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모든 선택지를 다 고를 수 있다는 말은 곧 그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단 하나의 선택지만 고를 수 있다는 말은 곧 선택된 그것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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