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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Nov 17. 2019

산티아고 순례길 #7. 토끼와 거북이

산솔(Sansol)-로그로뇨(Logrono)/21km



넓은 들판이 보이는 알베르게의 위치 덕분에 아침부터 시원한 풍경을 보고 출발할 수 있었다.




탁 트인 하늘과 일출 전 노랗게 빛나는 나무들을 보며 오늘은 또 어떤 길이 펼쳐질까 기다려졌다.




작지만 나름 있을 건 다 있었던 마을 산솔을 지나치고


얼마 걷지 않았는데 곧바로 다음 마을이 나타났다.


오늘의 목적지 로그로뇨까지는 약 21km.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있는 집이 귀여웠다.




마을을 지나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몇 번 마주쳤던 내 또래 순례자가 보였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소개를 주고받았다. 미국에서 온 데이빗은 나보다 2살이 많았고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렇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혼자 걸을 때보다 풍경에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쑥쑥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었던 오늘의 길, 높은 곳에서 잠깐 쉬는 동안 데이빗이 노래 한 곡을 들려줬다. 내가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뮬란 ost 'reflection'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이 노래를 들을 줄이야.

디즈니 노래를 좋아한다며 고맙다고 전하니 또 다른 노래를 틀어준다. 이번에는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 올라프가 나온 겨울왕국 노래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튀어나와 유쾌하게 걸어준 데이빗이 꼭 올라프 같았다.

쉬다 보니 존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조금 더 쉬다 함께 출발했다.


  

존과 데이빗은 한동안 농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름 대학교에서 농구 소모임에 들어갔을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지만 외국 농구 선수들을 술술 내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둘이 선수마다 의견을 주고받기도, 또 공감하는 감탄사가 재미있어 엿들으면서 걸었다.


 

오늘따라 찻길을 건너기도 숲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길이 많았다. 그래서 남색 위 노란 화살표가 더 반가웠다.




유독 크고 많았던 마을을 가리키는 이정표에 생각보다 큰 마을이구나 하며 들어선 곳 viana

성인의 축일이 다가와 축제 준비에 한창이던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날을 잘 맞춰 축제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살 게 있다는 데이빗을 따라 순례 용품을 파는 가게에 들어갔다. 들어가니 멋진 우비가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그 우비를 보니 앞으로 비는 또 올 것이니 일회용 우비를 대신할 판초우의를 장만할까 망설여졌다.

그러다 짐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 일회용 우비를 믿어보기로 하며 마음을 접었다.



 



로그로뇨도 이런 분위기이길 바라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20km를 가리키던 이정표는 어느새 5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르막길에서 자전거 순례자를 만나면 존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게 되지만 이렇게 평지에서 만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느리게 움직이는 다리는 기분 탓이겠지?








마을에 들어서니 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 보였다. 잠시 발을 담가보자는 데이빗의 말에 쉬기로 했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잠시 누워 하늘을 구경하기도 했다.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려 의도치 않은 짧은 낮잠을 가졌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이미 수많은 가방들이 놓여있었다. 오늘 나름 일찍 나왔는데, 또 걸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 많은 순례자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낮잠을 자는 사이 거북이한테 역전당한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앞에서 침대 커버에 숫자를 적어 나눠주는 것을 보고 오늘 내가 자게 될 침대는 어디일지 궁금했다.

또 한편으로는 랜덤으로 나눠주기 때문에 1층에서 잘 수 있지 않을까 떨리기도 했다.

나, 데이빗, 존 순서대로 번호를 받고 과연 누가 1층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서로 바꿀 것인지 고민하며 방으로 올라갔다.

 

내가 받은 번호는 B-6. 안 바꿔서 천만다행이었다. 오늘도 1층에 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연속 3번의 높은 적중률이니 이로써 존과 함께 체크인하면 1층 침대를 받을 수 있다는 공식에 신뢰가 생겼다.



일회용 커버를 씌우고 미리 짐을 정리하고 빨래까지 모두 마친 후 오늘은 쉬다 나갈 생각에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침낭 속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바로 앞 침대를 받은 데이빗이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자기가 20개를 하면 5개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에 '설마 하겠어' 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쉬지 않고 팔굽혀펴기를 한다. 그렇게 걷고도 아직 쌩쌩한가 보다. 이제 내 차례라는 말에 애써 웃음으로 넘겨보았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다리에서 지금까지 느껴지지 않았던 아픔이 느껴졌다. 항상 씻고 난 후에 마을을 산책했는데 아무래도 이게 다리를 풀어주는 역할을 했나 보다. (조금이라도 걸어주고 누운 날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니..!)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니 로그로뇨도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


곳곳에 걸린 깃발과 전통의상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덕분에 그 분위기는 배가 되었다.


내일 먹을 간식거리와 한인마트에 들려 라면 몇 개를 집었다.

또 지금까지 탈없이 잘 지낸 것에 보상하고자 젤라또를 먹기도 했다.





오늘도 든든히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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