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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Nov 17. 2019

산티아고 순례길 #6. 헤어짐

아예기(Ayegui)-산솔(Sansol)/27km



처음으로 쉽게 잠들지 못했던 긴 밤이 지나갔다. 3시간도 채 자지 않았지만 낮잠 덕분에 크게 피곤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침낭을 들고 나오니 이미 갈 채비를 마친 K가 보였다. 오늘 하루도 좋은 길이 펼쳐지길 응원하며 "부엔까미노" 인사를 나누고 나도 떠날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에는 어제 남은 음료수를 마시려 부엌으로 내려가다 H를 만났다. 나에게 다 데워진 브리또 절반을 건네주었다. 따듯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출발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받기만 하는 것 같아 간식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던 마들렌을 꺼내니 아침을 거하게 먹는 편이 아니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동시에 어제 P가 주었다며 토마토 주스를 따라주었다. 그런데 먼저 마신 H의 표정이 좋지 않다. 토마토 주스가 아니라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였던 것이다. 덕분에 아침부터 한바탕 웃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H와도 이따 보자며 인사를 건네고 먼저 출발했다.




걷기만 하는 단순한 하루에 점점 익숙해진다. 이제는 마을을 떠나는 아쉬움보다 오늘은 어떤 길이 펼쳐질지 상상하고 기대하게 된다.

아담한 포도나무들을 보며 걷기 1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 듣기만 했던 건물이 보였다.


바로 순례자들을 위해 와인을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다. 수도꼭지를 열면 한쪽에서는 물이, 다른 한쪽에서는 포도주가 나오는 신기한 곳. 사실 나는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해 와인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이곳을 지나치면 한 모금 마셔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무 이른 시각에 나와 아직 닫혀있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순례길은 노란 화살표만 보고 걷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두 갈래 길이 나와서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와인 수도꼭지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두 갈래길이 나왔다. 지금까지는 경사가 있더라도 짧은 길을 선호했지만 피레네 산맥에서 호되게 당한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더 긴 길을 택하고 여유를 얻어보기로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항상 등 뒤에서 해가 떠올라 앞으로 해가 지기 때문에 걷는 동안 햇빛을 마주할 일이 드물다. 시계를 확인하기 귀찮을 때에는 앞에 보이는 내 그림자가 얼마나 짧아졌는지를 보며 가늠할 수 있다.






 

한동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마을을 지날 때 의자 아래에서 쉬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론세스바예스 앞에서 만났던 고양이처럼 살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얘라도 만나 반가웠다.



다시 자연 가득한 풍경 속에서 꽃과 나무를 보며 걷다가 이번에는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반가워 쳐다보니 별 관심 없다는 듯 쿨하게 지나갔다.




마을을 지날 때에는 다른 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이곳저곳 잘 살피며 걸어야 한다. 노란 화살표 외에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놓은 화살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모자 끈을 꽉 조이고 걸었다.

바람이 걷는 방향으로 불지 않아 걷기 쉽지 않았지만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소리는 참 좋았다.


 





오늘의 목적지 로스아르고스를 9km 남겨두고 신발끈을 고쳐 묶고 있던 K를 만났다. 길 위에서 처음으로 만나, 또 오늘 길 위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해 반가운 마음이 배로 생겼다.

 


같이 걷다 보이는 푸드트럭에 얼른 들어갔다. 어쩜 딱 필요한 순간에 나타났는지.



스페인 오렌지주스가 맛있어서 계속 먹다가 위에 구멍이 날 뻔했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오렌지주스 한잔을 주문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맛있어서 한 모금 마시고 씩 웃고 그렇게 마시고 웃기를 반복했다.


세요도 잊지 않았다. 귀여운 화살표 순례자가 스틱을 잡고 걸어가는 모양이다.





화살표 위에 꽃을 심어 가지런히 올려놓은 신발이 보였다. 아마 더 이상 신을 수 없어 저렇게 남겨놓은 것 같았다. 홀로 남겨진 신발을 보며 내 신발은 어디까지 버텨줄지 궁금했다. 산티아고까지 쭉 버텨주면 좋을 텐데.



혼자 걸을 때에는 풍경만 담았는데 누군가와 함께 걸으니 풍경 속에 있는 나를 담을 수 있었다. 가리비 하나 달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신나 보이는 건 왜일까.



걷다 보니 자전거와 차가 멈춰있는 게 보였다. 엄청난 수의 양들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익숙치 않아 나도 잠시 멈춰 양을 구경했다.



덩치는 양보다 훨씬 작지만 열심히 뛰어다니며 양을 관리하는 개가 귀엽기도 멋있기도 했다.



그냥 놓칠 수는 없어 카메라로 열심히 담았다.


잠시 후 H도 만나 오늘은 혼자 마을에 도착하지 않고 셋이 함께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막 12시를 넘긴 시간이라 마을이 한산했다. 점심을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광장 앞에 있는 한 가게로 들어가 파스타를 주문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더 걸을지 이곳에서 멈출지 고민했다. 오늘의 길은 평지가 대분이라 아직 크게 힘들지 않았다. 7km만 더 가면 마을이 있다는 말에 더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H와 K는 여기서 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점심 식사를 하고 헤어져야 함에 아쉬웠지만 각자의 계획이 있으니.

왠지 셋이 만나는 순간이 마지막일 것 같아 평소 안하던 핸드폰을 들었다. 몇 번 고민하다 사진을 함께 찍을 것을 권유하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로스아르고스 이후로 순례길이 끝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남긴 사진을 볼 때면 '이때 같이 찍자고 하길 참 잘했구나' 싶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음 마을로 향했다. 길 위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걷고 먹고 자기만 하면 되는 하루가 반복되니 이런 생활은 익숙해지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7km라는 멀지 않은 거리지만 그 사이에 아무런 가게가 없다는 말에 살짝 긴장하며 들어선 다음 마을 가는 길.



쭉 뻗은 길이 인상적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어떤 구간이 가장 기억에 남냐고 물어보면 나는 산솔가는 길을 빼놓지 않고 말할 것이다. 길도 길이지만 이날 날씨와 하늘도 크게 한몫했다.


시원하게 뻗은 길과 적당하게 있는 뭉게구름의 조합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또 옆으로 펼쳐지는 황금빛 밭은 얼마나 멋진지. 풍경에 감탄하며 앞, 옆, 뒤 돌면서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저 앞에 멈춰 선 두 명이 보였다. 어제 만난 존과 Ken이었다. 분명 내가 먼저 출발했고 걸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앞에 있었을까. 내가 점심을 먹는 사이 지나쳐 만날 수 없었나 보다.

잠시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Ken이 먼저 출발하고 존과 내가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쉴 곳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의자가 보였다.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도 나무 그늘 아래에 놓아둔 의자였다. 이런 호의는 또 받아주는 게 예의니 잠시 앉아 쉬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또 한동안 쫙 펼쳐진 길을 걷고 걸어 오늘의 목적지 산솔에 도착했다.

분명 ken과 산솔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들어오니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모양의 가방이 보여 산책을 나갔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산솔 알베르게가 2개였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체크인을 해버린 상황이라 대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워낙 작은 마을에 주로 이전 마을인 로스아르고스에서 머무는 탓에 이날도 순례자가 정말 없었다.

덕분에 오늘도 1층 자리를 얻었다. 이상하게 존과 함께 체크인을 하는 날은 1층을 받게 된다. 행운을 잔뜩 가지고 있나보다.



너무 작은 마을이라 기대하지 않고 둘러보는데 작은 구멍가게가 보였다. 얼른 들어가 내일 걸으면서 먹을 간식을 구매했다.




또 다른 산솔 알베르게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6일 만에 처음으로 먹어보는 순례자 메뉴였다.



음료수부터 전식 중식 후식까지 아주 거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 마을에 사는 개인지 순례자와 함께 걷는 개인지는 잘 몰랐지만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개가 귀여워 찍은 사진.

이렇게 순례길 위에서는 자신의 반려동물과 함께 걷는 사람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이 마을의 알베르게는 2개이지만 주인이 같아 도장도 색깔만 다르고 모양은 똑같았다. 이름이 같아 일어난 해프닝,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것도 추억이니.


혼자 떠난 순례길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계속해서 펼쳐지는 풍경과 함께 걸었던 다른 순례자 덕분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아픈 곳 없이 무사히 하루를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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