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가 돼서야 길을 나섰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이른 시간이지만 순례길, 특히 여름의 순례길에서는 이른 편이 아니다. 해가 뜨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 출발하는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있다.
어제 오후 내내 쨍쨍하던 하늘이 하룻밤 사이에 다시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사진을 찍기에는 맑은 날이 좋지만 걷기에는 이렇게 적당히 구름 낀 날이 최고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있던 고양이.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미는 아기 고양이도 보였다.
멀리서 앉아 사진을 찍는데 바짝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바깥이 궁금했는지 고개를 내미는 아기 고양이에게 엄마 고양이가 뒤를 돌아보며 들어가라는 듯이 눈치를 주었다. 엄마 고양이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쏙 들어갔다가 앞을 보면 다시 슬그머니 나오는 아기 고양이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계속 보고 싶었지만 괜히 나 때문에 긴장하는 게 미안해서 얼른 일어나 다시 걸었다.
하룻밤만 머무르고 다음날 아침이 오면 다시 화살표를 따라 걷는 하루.
생장, 론세스바예스, 수비리까지만 해도 아침에 마을을 떠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아쉬웠는데 이제는 점점 익숙해진다. 사실은 아직도 약간 아쉽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애써 '다음에 또 올 수 있으니까' 하고 익숙해지려 노력 중이다.
이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화살표를 따라 걷고 있다.
어쩜 구름 가득한 하늘도 예쁠까? 두껍게 가득하지 않고 얇게 펴져서 사이사이로 하늘색 하늘과 햇빛이 보인다.
이제 겨우 5일차인데 풍경을 바라보는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였나보다.
길 위에는 꽃이 참 많다. 누가 하나하나 관리해주는 것도 아닌데 저마다 자리를 잡고 예쁘게 피어난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이런 꽃들이 보이면 나는 자연스레 카메라를 들게 된다.
예쁜 꽃을 지나칠 때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 '내가 길가에 꽃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순례길 위에서는 별것도 아닌 걸로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함을 느끼고 때로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기도 한다.
바쁜 생활에서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하루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저 내 방식대로 잘 자고 잘 먹고 잘 걸으면 충분한 하루. 간단하다 못해 살짝 지루해 보이는 그런 생활이 반복되니 이제야 사소한 것들에 집중을 할 힘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초록색 가득한 길을 지나고
노란 꽃 가득한 길을 지나고
빨간 장미 가득한 길을 지나니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를 시작한 지 1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라 쌩쌩했지만 아직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은 발가락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는 느릿느릿 걸어보기로 했다. 거북이처럼.
마침 보이는 작은 공원.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어제 P에게 받은 과일을 꺼냈다. 맛있는 과일을 찾았다며 한번 맛보라고 건네주신 노란빛을 내는 복숭아.
바로 옆에 있는 수돗가에서 씻어 한입 베어 물었을 때 그 행복이란! 달달한 게 지금까지 먹어본 과일 중에 단연 최고였다. ‘이렇게 맛난걸, 몇 개 남지 않은 걸 나누다니....’ 선뜻 내어준 P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복숭아와 마들렌을 먹는 와중에도 나는 간간이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부엔까미노"하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쉬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다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셨다. 그러다 첫날 만났던 스페인 친구가 지나가길래 외워두었던 스페인어로 이름을 물었다.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이름을 말해주었다.
길 위에서 달팽이도 정말 많이 보였다. 얘도 순례길을 걷는 중인가!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겠지만 이 길 위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잠시 멈춰 달팽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걸을 때만 가방을 매는 나와 달리 평생, 24시간 내내 가방을 메고 다니는 달팽이가 존경스러웠다. 저 친구는 옷이나 세면도구 같은 간단한 물건도 아니고 집을 들고 다니니.. 반대로 생각하면 길 위 어디든 모두 잘 수 있는 집터이니 부럽기도 또 멋있기도 하다.
Estella까지 16km가 남은 지점.
포도밭이 펼쳐진 길이 나온다는 말에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 보았던 키 큰 포도나무들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심어져있던 포도나무는 아기자기했다. 내 어깨까지 오는 길이라 나무 꼭대기도 거뜬히 볼 수 있었다.
돌담 너머로 보였던 아래부터 쫙쫙 갈라져 있던 나무들.
풀들에게 치이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순례길은 끊임없이 다른 길이 펼쳐진다.
또 색깔은 온통 초록색일지 몰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나무, 풀들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덕분에 길을 걸으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겠지만 잠깐 저기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보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음 마을이 가까워지면 신이 난다.
얼마 머무르지도 않고 다시 지나칠 마을이지만 또 저 마을을 지나도 길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자연 가득한 길만 계속 걸으면 어느 정도 걸어왔는지 예상할 수가 없지만 이렇게 마을을 하나 둘 지나면 점점 앞으로 가고 있다는걸, 산티아고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좀 더 실감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또 마을에는 잠시 쉬어갈 바나 의자가 많으니까.
이른 아침, 하늘에 가득했던 구름이 점점 사라져갔다.
이내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이 느껴졌다. 물을 마시다가 물병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예뻐 담은 사진.
물병 안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 풍경과 그 안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보였고 물병을 만드신 분의 재치에 감탄했다.
쨍한 날씨 덕분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 풍경에 빠질 때쯤 점점 뜨거워지는 햇빛이 느껴졌다.
'구름과 햇빛을 적절히 섞으면서 풍경은 쨍하게 보이지만 덥지는 않은 그런 날씨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역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맛이다.
잠시 쉬었다가 가라는 듯 예쁜 풍경으로 유혹하며 여기저기에서 발을 잡는다.
그럼 나는 아주 보이는 족족 유혹에 넘어간다.
그렇게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 속에서 하늘, 하양, 노랑, 보라 색깔들이 유독 잘 보일 때쯤 알록달록한 곳이 등장했다.
장소와 딱 맞는 이름 '파라다이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곳,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군가가 순례자들을 위해 꾸몄을 생각을 하니 감사하기도 또 힘이 나기도 했다.
꼭 응원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산티아고까지 676km. 2일차에 본 숫자 790km보다는 작아졌지만 여전히 상상되지 않는 거리.
아직은 애써 계산하려 하지 않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그냥 걷고 걸었다.
유독 튀어나와 손 꼭 잡고 있던 나뭇가지들.
Lorca까지 2.8km, Villatorta까지 7.4km.
초록색 사이에서 유독 잘 보였던 빨간 꽃. 이 꽃이 양귀비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풍경에 감탄하고 구경하며 걸었다.
파랑 노랑 표지판도 좋지만 돌 위에 그려놓거나 아예 돌을 주워 만들어놓은 화살표가 더 좋다.
다음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나하나 옮긴 배려가 듬뿍 느껴진다.
조화로 착각할 만큼 생기 넘쳤던 꽃들. 마을 대부분의 집이 문이나 창문을 꽃으로 가득 꾸며놓았다. 집에 돌아가면 나도 한번 시도해봐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애꿎은 꽃을 괴롭히지 말기로 하며 방금 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여름에 길을 걷다보니 가끔 나와주는 나무그늘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나뭇잎이 만들어놓은 액자 사이로 보이는 경치는 또 얼마나 멋있는지. 그야말로 쉴 때마다 볼 수 있는 자연액자다.
아름답다. 진짜 그림 같은 길이다.
이런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어느새 바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혼자 걸어도 심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만나는 순례자와 나누는 인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혼자 출발했지만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걷고 있을 때 날 지나쳐가는 분들은 "부엔까미노" 외에도 "혼자 왔니?", "어디서 왔니?" 하고 말을 걸어주셨고 할아버지 순례자께서는 윙크와 귀여운 브이도 날려주셨다. 잠깐 동안 서로 나누는 짤막한 인사가 참 정감 있었다.
유독 살갑게 말 붙여주셨던 또 다른 순례자.
그렇게 다시 만난 작은 마을. 편해 보이는 나무 벤치가 보여 잠시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양말을 벗어 잘 마르게 햇볕이 드는 곳에 올려두었다. 가방에 있던 마들렌을 꺼내 먹으며 멍 때리다가 정신을 차리니 양말이 금방 뽀송뽀송해졌다.
먼저 와서 쉬고 있는 다른 순례자의 뒷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오늘은 거북이가 되기로 한 나도 다시 한 번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다가 발견한 개구리.
나무다리라 건널 때마다 타박타박- 소리가 났다. 주변이 고요해서 내 발소리만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리가 참 좋았다.
나뭇잎 터널. 저 아래에서 나룻배 타고 살살 다니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걷고 걸어 에스떼야 마을에 도착했다.
20km를 넘게 걸어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지만 다리를 보니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저 위에서 보일 마을의 모습이 궁금했다.
올라가서 바라본 마을은 생각보다 강이 넓었다.
날씨 참 좋구나.
순례길 위 마을답게 바닥 곳곳에 가리비 문양이 놓여있었다.
오늘 지낼 마을은 에스떼야가 아닌 그다음 마을 아예기. 작지 않은 마을 에스떼야를 그냥 지나가기가 아쉬워 세요라도 받아보고자 안내센터를 찾아갔다. 성당 바로 앞에 있어 찾아가기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도 받을 수 있는지 확실치 않아 조심스럽게 들어가니 내 커다란 가방을 보고는 단번에 "세요 받으러 왔니?" 하고 맞이해주셨다. 순례자 여권을 내미니 에스떼야가 적힌 도장을 꾹 눌러 찍어주셨다.
오피스 바로 옆에 있던 에스떼야 성당. 수많은 계단을 보고 올라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아래에서 열심히 바라본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후에야 알았다.)
에스떼야에서 1.5-2km만 더 가면 아예기다.
아예기로 가는 중에 일찍 가봤자 오늘도 2층을 배정받을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 침대에 미련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닌가 보다.
어차피 2층에서 잔다면 천천히 가는 게 덜 억울(?) 할 것 같아서 2km도 채 남지 않은 거리의 놀이터에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화살표 앞에서 떡하니 누우니 반항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그늘 아래 알맞게 놓인 벤치. 지금까지 들고 다니던 가방을 베고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침 솔솔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했고 또 햇빛에 투명해진 나뭇잎은 얼마나 예쁘던지.
5일만에야 쉬어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제대로 즐겨보고자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머리맡에 놓았다. 노래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소리까지 완벽했다.
그렇게 누워있는데 "여기서 뭐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먼저 도착해서 이미 짐을 풀고 마을 산책을 나온 Ken이 보였다. "일찍 가봤자 2층 받을게 뻔하니 여기서 편하게 쉬다 들어가려고요..."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이유라 우물쭈물 말하니 알베르게에서 보자며 다시 산책을 가셨다.
오늘은 제대로 늦게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또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러다 앉으려 일어나니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존과의 첫 만남 :-)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서 왜 쉬고 있었는지 시시한 이유를 말하기도 하고 서로 왜 걷게 되었는지 말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같이 아예기 알베르게로 향했다.
오늘의 숙소인 아예기 알베르게 San Cipriano.
그리고 이럴 수가. 이렇게 늦게 왔는데 1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첫 1층 침대가 기뻐서 한동안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샤워실이 목욕탕처럼 오픈되어 있었다. 다행히 내가 씻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씻었다면 살짝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늦게 도착한 게 딱 좋았다.
씻고 빨래를 한 뒤 존과 존이 소개해준 H과 함께 알베르게 앞 마트로 내일 먹을 간식을 사러 갔다. 출출한 배를 위해 저녁을 먹기 전 간식으로 도넛과 파이도 넣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잠깐 쉰다는 게 그만 낮잠을 자버렸다. 눈을 떠보니 오후 5시가 넘어가있는 시간. 이미 저녁 장을 사러 갔다는 연락에 알베르게 앞 의자에서 잠을 떨치며 기다렸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길래 빨래가 걱정되어 뒤편으로 가보니 다행히 잘 걸려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티셔츠와 바지가 모두 묶여져 있다. 누군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끝을 묶어둔 것이었다. 이런 센스는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이날 다들 에스뗴야에서 머무는지 알베르게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모든 방을 다 합쳐도 20명이 안될 정도로 적은 인원이었다. 그중에 나까지 한국 사람이 6명이었으니 1/3이나 차지하는 비율! 이곳에서 만난 5명의 한국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10시가 다 되어 잘 준비를 마치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에 6명뿐이라 푹 자기 좋은 환경이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가진 낮잠이 이렇게 크다니. 자려고 노력할수록 정신은 말짱해졌다. 고요한 방,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며 오지 않는 잠을 기다렸다.
이날 밤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