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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Nov 16. 2019

산티아고 순례길 #4. 순례길에서 만난 첫 비

팜플로나(Pamplona)-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23km



아침부터 빗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굳이 날씨 어플을 볼 필요가 없으니 귀찮은 일 하나가 사라진 것을 기뻐해야 했을까. 침낭 속에서 발을 움직여보는데 발가락 상태가 아무래도 좋지 않다. 이번 순례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점프나 동키 없이 내 힘만으로 걷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거센 빗소리에 일회용 우비로 버티기  힘들 것 같아 가방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동키 사용기를 적어보면 알베르게에서 종이를 받아 5유로를 넣고 오늘 갈 알베르게를 써서 봉투를 닫으면 끝. 시시할 정도로 간단하다. 팜플로나 알베르게에서는 1유로를 내고 보관함에 넣어두어야 하니 5유로가 아니라 6유로인 셈이다. 맨몸으로 걸을까 하다가 작은 보조가방에 카메라를 담았다. 또 신발이 젖으면 갈아 신을 슬리퍼도 챙겼다. 비가 와도 카메라는 아직 포기할 수가 없다.


우비를 가져오지 않은 분이 계셔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일회용 우비 두 개 중 하나를 드렸다. 내가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은데 아직 나누려면 멀었다. 순례길이 끝날 때까지 받은 만큼 나누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은 시작부터 끝까지 생장 동기 Ken과 함께 걸었다.

길을 나설 때 비가 정말 많이 내렸다. 우비를 입어도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비에 옷이 젖는 게 느껴졌다.


마을을 빠져나올 때 우비를 푹 눌러쓰고 앞사람 신발만 바라본 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우산을 쓴 할머니께서 “순례길을 걷고 있니?” 하고 물으셨다.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여기는 순례길이 아니라며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길을 안내해 주셨다. 아래만 보며 걸어서 화살표를 놓친 것이었다.

뒤를 바라보니 어느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잠시 뒤 다시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맞는 길을 알려주신 할머니께 감사하면서도 분명 내 뒤로 몇몇 순례자들이 있었는데 알려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 한동안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은 우리를 반가워했다. ‘왜 반가워하지..?’ 당황스러움을 느끼려는 찰나 “오! 무사히 맞는 길을 찾았구나! 뒤에서 열심히 불렀는데 너희가 너무 빠르게 떠났어.” 하는 말이 들렸다. 지금까지 왜 알려주지 않고 그냥 갔을까 생각해보면서 걸었던 게 부끄러웠다. 처음부터 화살표를 제대로 보지 않은 것도, 빗소리에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도 결국은 다 내 실수인데.

아무튼 이렇게 내 마음대로 해버린 오해가 풀렸다.


비에 손목과 바지가 홀딱 젖었을 때쯤 빗줄기가 약해졌다. 얼른 가방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바람막이 안으로 숨겼다. 그러다 찍고 싶은 풍경이 나타나면 렌즈를 살짝 빼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는데 오늘은 낮이 되어도 춥기만 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추웠다. 제발 10km만 젖지 말고 버텨달라고 기도했던 신발은 거짓말처럼 10km를 버텼고 그다음부터는 빠르게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까지 멈출 수가 없었다. 물도 쉽게 마시지 못하고 걷기만 했다. 이제 정말 쉬고 싶을 때 딱 나타난 성당에 들어갔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성당 안에서 옷을 말리고 있었다. 입구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 잠시 비와 추위를 털었다. 어제 물집이 겨우 마르려던 참이었는데 다시 제대로 젖어 원상태가 되었다.


이왕 젖은 거 그냥 그대로 갈까 새 양말을 갈아 신을까 고민하다가 다시 쉴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 갈아 신기로 했다. 마른 양말을 신으니 뽀송뽀송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동안 쉬면서 몸을 말리니 훨씬 좋아졌다. 아직 축축한 신발과 다시 차가운 공기를 만나 굳어버린 몸만 빼고.

얼른 열심히 걸어서 몸을 달궈보자며 다시 한발 한발 걸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얇아져서 옆 사람과 말을 나눌 수 있을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형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구불구불한 오르막이 반복되었던 용서의 언덕 가는 길.

고도표에 표시된 오르막길을 보고 살짝 겁먹었는데 먼저 다녀오셨던 분이 표현한 것처럼 "딱 용서할 수 있을 만큼만 힘들었던 길" 이었다.


위에 도착하니 누군가 돌로 만들어놓은 하트가 보였다. 그 옆으로는 각자의 소원이 담긴 작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나도 작은 돌을 쌓고 소원을 빌어보려다 다른 사람의 탑을 망치고 싶지 않아 소원만 빌었다.


순례길 위에서 나름 유명한 곳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왜 용서의 언덕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을까?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게 마냥 기쁘기만 했다. 이제 보니 물에 젖은 생쥐 꼴이다.


이런 탁 트인 풍경을 보고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했던 것들을 용서하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용서받아야 할 일들을 떠올려보라는 뜻이었을까.

용서의 언덕을 지나고 나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돌길에 비가 오니 미끄러워서 걷기가 쉽지 않았다.


비가 와서 걷는 것은 힘들어졌을지 몰라도 오늘의 색깔은 더 선명해졌다.


노란 밀밭이 가득 펼쳐진 오늘의 길 덕분에 계절은 여름이었지만 가을의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걷다 보니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달팽이가 눈에 들어왔다. 비가 와서 저 위로 피한 걸까?

카메라를 들고 걸으면 좋은 점이 참 많다. 평소에는 주의 깊게 보지 않던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칠 것 같던 비가 걷다 보니 어느새 멈췄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나는 일회용 우비가 걸리적거렸지만 젖어서 덜덜 떨리는 몸에 이 비닐 한 장이 주는 따듯함이 생각보다 커서 그대로 입고 걸었다.


걷고 있는데 Ken이 "평소 걸으면서 듣는 노래가 있는데 한 곡 들려드릴까요?"하고 물어보셨다.

그렇게 들려주신 노래는 김동률의 '출발'이었는데 가사가 순례길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길 위에서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인상적이었던 상황들이 떠오르는데 김동률의 출발을 들으면 이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노랑 초록 가득한 풍경, 질퍽질퍽한 길, 시원과 추움 사이의 온도.



어느덧 4.5km로 줄어든 남은 거리. 이제 1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남아있었다.


마지막 작은 마을을 지나니 곧 나타난 오늘의 마을.



알베르게 푸엔테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바로 가방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에 곧장 2층에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홀딱 젖은 상태로 침대가 있는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비가 그치고 점점 해가 나오는 중이었다.




이미 몸은 젖어 아무 곳이나 앉아도 괜찮았겠지만 나름대로 젖지 않은 곳을 찾아 앉고 가방을 기다렸다.



순례길 위 식당, 바, 성당, 숙소에서 세요(도장)를 모아야 산티아고에서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아직 몇 개 모이지 않은 세요.

이 순례자 여권을 다 채우는 날이 올까?

아무튼 제각각 다른 모양이 신기하다. 길 위에 얼마나 다양한 모양이 존재할까.





간식을 먹으며 배를 채우다 가방을 찾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배낭 아랫부분이 젖어있었다. 이렇게 젖을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들고 올 걸 싶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직접 들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들고 올라와 씻은 후에는 곧바로 빨래를 했다. 바지 곳곳에 묻은 진흙이 오늘 걸어온 길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깨끗한 물이 나올 때까지 오늘은 신경 써서 여러 번 헹궈주었다. 신발 역시 어제까지만 해도 깨끗한 신발이었는데 이곳저곳 골고루 진흙이 묻어버렸다. 말려서 털어낼까 하다가 해가 나오는 게 보여 물로 씻어내고 볕이 잘 드는 곳에 신발을 올려놓았다.


머리를 말릴 겸 2층 테라스로 가니 맑은 하늘이 보였다.

너무나도 좋은 날씨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5시간만 빨리 보여주지 싶다가도 비를 맞으며 걸어본 경험을 할 수 있었음에, 맑은 하늘 아래에서 쉴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오늘 할 일도 모두 마쳤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 산책을 나갔다.



오늘 아침은 긴 티에 바람막이를 입어도 춥던 날씨였는데 이제는 반팔만 입고 돌아다녀도 더운 날씨였다.



여왕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답게 꽤 큰 크기의 돌다리가 놓여있었다.

다리 위에서 잠시 풍경을 감상하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다리를 둘러보다 다리 아래 잔디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앉기 괜찮은 곳을 찾아 따듯한 햇빛을 즐겨볼 생각이었다. 오는 길에 마트에서 들려 샀던 초코칩을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침과 다르게 내리쬐는 햇빛에 노곤하면서도 옆에서 생장 동기 ken과 팜플로나에서 알게 된 P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흥미로웠다. 순례길 위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사지 못하는 것이니 얼마나 소중한지. 한 명 한 명이 책과 같이 느껴졌다. 나중에 산책 나온 K가 우리를 발견하고 찍어준 사진 덕분에 이 사진을 볼 때면 이 순간이 떠오른다.

 


하늘은 아직 쨍쨍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었다.


비를 맞았으니 따듯한 국물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의 저녁은 라면과 밥을 먹기로 했다. 비록 훅 불면 날아가는 가벼운 쌀이었지만 순례길 위에서 얼큰한 라면에 밥까지 먹으니 아주 든든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가방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이것저것 버리는 시간을 가졌다. 손바닥만 한 수첩, 위험에 빠졌을 때 위치를 알리기 좋은 작은 고리형 피리, 쇠젓가락 등 고심하며 하나씩 줄여나갔다. 꼭 필요해서 챙겨 온 물건보다 혹시 몰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챙겨 온 것들이 많았다. 이런 것들만 줄여도 걷는 게 훨씬 편해질 텐데.


한바탕 가방 정리를 마친 후 생각보다 듣는 음악 스타일이 비슷했던 P와 자기 전에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추천하기도 추천받기도 했다. 덕분에 눕기만 하면 잠들었던 내가 이날은 노래를 듣기 위해 오랜만에 핸드폰을 두드리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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