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 Nov 16. 2019

산티아고 순례길 #3. 첫 물집

수비리(Zubiri)-팜플로나(Pamplona)/(22km)


                             


오늘도 알람의 도움 없이 일어났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자고 있거나 막 일어날 때 나갈 준비를 해서 배낭과 침낭을 밖으로 조심조심 들고나갔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눈을 뜨고 침낭에서 나오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할머니들이 “굿모닝~” 하며 인사해주셨다.

내가 꼴찌로 일어났다니! 4인실에서 같은 방을 쓰는 네 명이 다 일어났으니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불을 켜고 환한 방 안에서 준비를 하니 훨씬 수월했다.                                              

오늘도 간단히 빵 2개와 요플레 하나를 아침으로 먹었다.



마을 입구와 살짝 거리가 있었지만 순례길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복작복작한 알베르게가 아닌 편한 집에 온 듯했던 수세이아 알베르게. 문을 나서며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그게 언제쯤 일지, 그때도 이렇게 좋은 룸메이트를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가까운 미래는 아닐 것 같은 생각에 아쉬움이 가득 생겼다. 깊게 생각하면 발걸음을 옮기기 더 힘들 것 같아 더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그래도 골목을 빠져나오기 전에 아쉬움을 달래려 카메라에 담았다. 점점 출발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오늘은 오전 6시 반쯤 길을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도 좋지만 이렇게 적당히 구름이 있는 날씨도 좋다. 아직 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하늘에는 햇빛을 받아 연분홍빛을 내는 구름이 가득했다.

어제 복작복작했던 냇가와 다리 위는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잘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출발해도 문제없지만 일찍 출발하면 고요함 속에서 걸을 수 있어서, 또 걷는 도중에 매일매일 다른 일출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다음 마을까지는 약 2.9km, 그다음 마을은 5.5km. 곧 지나게 될 마을들이 궁금했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지나게 될 마을들은 과연 몇 개일지 궁금했다. 하루에 마을 3개만 지나쳐도 한 달이면 90개. 마을을 자주 지나칠 날도 있을 것이니 못해도 100개의 마을은 거뜬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비리를 빠져나오니 길이 다시 점점 숲길로 바뀌었다.

숲 속에서 혼자 아침산책을 하고 있던 말을 만났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걷기가 심심했는데 배웅받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서 멋진 사진을 찍어주었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말에게 보여줘야겠다.



 오늘도 어김없이 화살표를 찍고 있는 나. 가리비 모양은 그렇다 쳐도 색깔은 누가 정한 걸까? 남색과 노란색이 같이 있으니 더 예쁘다.


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인도가 따로 없이 차도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이른 시간이라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보지 못했지만 더 주의해서 걸었다.

화살표만 따라가면 도착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간단한지!

이제 고작 3일 차지만 이 길에는 다양한 길이 존재하는 듯했다. 걷다 보니 허리까지 오는 풀들과 같이 걸어야 하는 길이 펼쳐졌다. 아직까지 촉촉하게 젖어있는 풀을 보며 몸과 가방에 닿지 않게 긴장하며 걷다가 '젖으면 뭐 어때, 말리면 되지' 하고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생각을 바꾸니 걷는 게 편해졌다. 차도를 걷는 것보다 마음은 더 편했다.

고개를 돌리니 짙게 낀 안개가 가득한 풍경이 보였다. 매일매일 그림 같은 풍경이다. 순례길만큼 다양한 풍경을 한가득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일찍 일어나니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항상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길과 하늘, 날씨까지 모든 게 감사했다.

옆을 보고 감탄하며 뒤를 돌아보니 또 감탄이 나오게 아름다운 풍경. 오늘은 주황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몸을 낮춰 동그랗게 맺힌 이슬을 찍어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좁은 길에서 점점 가까이 오는 순례자가 보여 성급하게 찍었는데 너무 서둘렀나 보다.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 사진을 보면 풀 속에서 이슬에 집중하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곧 내려갈 방향으로 낀 자욱한 안개들과 그 사이로 솟은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뒤로는 하늘이 햇빛을 받아 분홍 보라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사진은 실제를 반도 못 담았으니..

이 풍경을 실제로 보았을 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멋진 풍경을 보고도 “예쁘다” 밖에 할 수 없는 내 글솜씨가 아쉽다.                                              

어제 이미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말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많이 놀랐던 터라 어제만큼 놀라지 않았다. 또 오늘은 귀여운 망아지도 몇 마리 보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기 말이 귀여워 사진을 찍으니 멀리서 엄마로 보이는 말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치 "왜 우리 아이 사진을 마음대로 찍나요!” 하며 따지러 오는 것 같았다. 혹시 울타리를 넘어오진 않을까 겁이 나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위에서 볼 때는 작게 보였던 나무들이 아래로 내려오니 꽤 크게 보였다.

                                                                                       

마을에 들어오니 보이는 agua/water. 마을 중간에는 이렇게 순례자를 위한 물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직 꽉 찬 물병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지나쳤지만 어제처럼 물을 다 마셨을 때, 마을에 마트가 없었을 때 발견했다면 정말 반가웠을 것 같다.


                                           




아직 출근 전인 해. 사진이 많아서 오래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5km도 걷지 않았을 때다. 오전에는 힘이 넘쳐서 이리저리 담을 것들을 찾고 카메라를 움직이게 된다.


사실 순례길에 카메라를 들고 가도 괜찮을지 많이 고민했다. 카메라 무게가 감당 가능한지, 혼자 떠나는 순례길에서 40일 동안 씻으러 갈 때나 잘 때 관리를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근데 또 예쁜 풍경을 보면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할 것 같았다.


나는 평소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해보는 게 더 많다. 해보지 않으면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있지만 하고 나면 ‘앞으로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으니까. 1-1.5kg만 더 지면 평생 볼 사진을 담아올 수 있으니, 멋진 풍경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으니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순례길을 함께 가보자고 꼬실 계획도 아주 살짝 있었다.)




그렇게 마을 하나를 지나고 두 번째 마을에 도착하기 전, 밝아지는 풍경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해가 나왔다. 확실히 해가 나오면 더워진다. 6월이라도 새벽에 출발할 때에는 가을처럼 추워서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출발한다. 하지만 해가 올라오면 바람막이를 벗을 준비를 하게 된다.




노란 햇빛 가득 받으며 걷는 숲 길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초록색이 가득할 것만 같았던 숲이 금색으로 반짝거렸다.








해가 나오면 안개가 사라질 법도 한데 이날 안개는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진이다. 길을 걷다 보면 순례자들의 신발을 자주 볼 수 있다. 돌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안에 흙과 꽃을 넣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이정표 위에 딱 올려놓은 경우도 가끔 있다.

이제 아무런 경계 없이 놀고 있는 말을 보아도 막 떨리지는 않다.




어제처럼 숲길과 마을이 번갈아 나오는 아기자기한 길이다. 순례길 초반은 아기자기하게 예쁜 길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걷다가 들리는 시원한 물소리에 잠깐 걸음을 옮겨보니 냇가가 보였다. 여기 도착할 때쯤 한 부자가 이곳에서 쉬다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발을 담가볼까' 하다가 아까부터 양쪽 새끼발가락의 느낌이 좋지 않아 얼른 팜플로나에 도착하고 싶었다. 잠깐 멈춰서 바라보다가 바로 출발했다.



팜플로나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 게 반갑다.



다리를 건너니 분홍색 꽃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는 식당이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듯 보였다.



그대로 지나치니 곧바로 차도가 나온다. 두리번거리며 도보를 찾아보지만 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만 보인다. 도로 한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맞나 보다. 이렇게 넓은 차도를 걷는 것은 처음이다.


아마 왼쪽에 나있는 풀길이 인도인 듯 보였지만 걷기에 너무 좁아 보였다. 차가 오지 않으니 차도 구석으로 붙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순례길이 맞나 싶을 때 나와주는 화살표가 참 듬직하다.



정말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같다. 이 앞에서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으니 뒤에서 오는 순례자가 왼쪽이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때는 '저분 처음이 아니구나. 대단하다.'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돌에 새겨진 화살표가 보인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왜 저 때는 보지 못했을까? 화살표=노란색이라는 공식이 깨졌다.                                              



그리고 딱 이 길을 걸을 때 새끼발가락에 문제가 생겼다. 처음 겪어보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의 아픔이 느껴졌다. 얼른 앉을 곳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평소 걷던 반의 반 발자국으로 조금씩 걸어 이동했다.



평소였으면 성큼성큼 걸어 도착했을 거리지만 이때는 길만 건너면 되는 저곳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잠시 뒤 나타난 작은 마을에서 40분을 쉬었다.


성당 앞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고 발을 보니 양쪽 새끼발가락이 사이좋게 터져있었다. 어제 필요한 양보다 많이 샀던 장이 무리였나 보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다친 것을 보기 전까지는 아픈 걸 잘 모르다가 아주 작은 상처라도 보기만 하면 그때부터 온 신경이 그곳으로 간다.


순례길을 오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물집이 잡혀본 적이 없어서 '나는 물집이 생기는 체질이 아니니까' 하고 밴드 몇 개만 챙겨 온 것이 민망했다. 동시에 나와 여행을 다니면 자주 물집이 생기는 언니 생각도 났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역시 백번 듣는 것보다 직접 느끼는 게 더 확실하다.


급하게 인터넷에 ‘물집 치료하는 방법’을 검색해보니 다양한 방법이 나왔다,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많이 나온 방법을 따라 했다, 터트린 후에 잘 말려줘야 한다는데 이미 터졌으니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물기만 닦으면 마르는 줄 알고 최대한 공기와 닿는 부분이 넓어지게 했다.                                           


임시방편으로 밴드를 붙이고 나름 푹신하게 휴지도 깔아준 후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30m도 가지 못하고 다시 멈췄다. 보호해 주던 막이 사라지니 닿기만 해도 쓰라렸다. 지금까지 즐겁고 예쁘던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10km도 넘게 남은 길을 무사히 잘 끝낼 수 있을지 막막했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데 지금까지 잘만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왜 갑자기 보이지 않는지. 혼자라는 사실이 확 와 닿았다.

등산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발목에는 좋지 않겠지만 당장 내 새끼발가락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금방 차던 물집의 물도 바람이 통하니 점점 말라갔고 아픔이 덜어졌다.



다시 풍경을 보며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넓은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무 문제없이 순탄하게 2일을 걷는 걸 보고 "네가 너무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여기 재미 좀 가져가." 신경 써주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

싸움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물집,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싶은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오르막길이 나왔다. 타이밍도 좋지.

오늘의 목적지까지 8km 남은 이정표가 보였다. 줄어들지 않았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에 힘이 났다.

 

신경 쓰이는 곳이 생기니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어졌다. 사진에서 느껴진다. 사진에 담겨있는 이정표의 거리가 쑥쑥 줄어드는 게 보인다.


 

태양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날씨와 오르막길은 땀이 날 수밖에 없는 환상의 조합이다. 다시 말썽 부리는 발가락 덕분에 잠시 멈춰 풍경을 담았다. 사실, 그냥 멈추면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일까 풍경을 구경하는 척하며 서있었는데 마침 내 뒤에 있던 순례자가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분이었다.



내 상황을 말하고 도움을 청해도 될지 고민했다. 아까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집이 생겼는데 너무 아프다고 털어놓고 싶었는데 정작 마주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어제 필요 없는 짐을 받아준다는 걸 거절했다면 오늘 그 무게까지 함께 들었을 것이고 분명 좀 더 일찍  슬리퍼를 신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니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 멀어지기 전에 얼른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와중에 길은 또 얼마나 예쁜지.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 빨간 지붕 집 한 채가 보였다. 갑자기 떠오른 노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흥얼거리며 내려왔던 걸 아직 살만했나 보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와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울퉁불퉁 모양을 예상할 수 없는 산길과 다르게 쭉 뻗은 평평한 길이 유독 반가웠다.

발가락에 살짝만 힘을 주면 땅과 만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보도블록의 소중함, 감사함이 마구 생겼다. 이 좋은 것을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넓은 공터와 여유롭게 앉아 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쉬면 더 아프다. 오늘은 빨리 끝낸 후에 쉬고 싶었다.


분명 팜플로나 이정표를 봤는데 좀처럼 알베르게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과 화살표를 따라 걷고 걸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론세스, 수비리에서 만난 미국 친구 웨슬리를 또 만났다.

스머프 초콜릿의 힘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팜플로나  다음 마을까지 가기 전에 쉬는 중이라며 손을 흔들어준다. 다시 힘을 내서 걸었다.


                                              






















길을 건너다 움직이는 신호등이 보였다. 거리는 푸근하지만 신호등은 나름 최첨단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남은 거리를 알고 난 후 도무지 줄지 않았던 마지막 1km 덕분에 지도를 보지 않고 걷겠다 다짐했건만 오늘 꺼내본 지도 횟수만 몇 번인지..

힘들 때 지도를 보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을 지났던 큰 공원을 넘으니 간판을 내놓은 알베르게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팜플로나 시내에 들어왔다. 알베르게까지 1km도 남지 않았던 곳.



출발한 지 약 5시간 만에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늘에 자리를 잡고 냅다 앉았다.


12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20분 정도를 앉아 기다렸다.


오늘은 먼저 도착하신 생장 55번 알베르게에서 함께 시작한 분! 생장부터 지금까지 걸으면서 길 위에서 마주친 적이 없어서 오늘은 마주치려나- 조금 빨리 걸어보셨다며 내가 늦게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아쉬워하셨다. 오늘도 달달한 초콜릿을 손에 쥐어주셨다. 저 작은 초콜릿을 먹고 얼마나 힘이 나던지.


 

오늘은 거리가 길지 않아서 12시 이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줄이 이곳저곳 많이 생겨 일찍 온 것보다 뒤쪽에 줄을 서게 되었다. 10분 일찍 들어간다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느긋하게 순서를 기다리며 체크인했다. 들어가보니 일찍 온 순서대로 입구 쪽에 침대를 배정받는 방식이었다. 여유롭게 기다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중간 자리의 2층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난 오늘로써 1층 침대의 미련을 훌훌 털어버렸다.


저녁이 되기 전에 얼른 일회용 시트를 씌우고 샤워를 했다. 수용 가능한 인원이 많다 보니 샤워를 하기 위해 또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다들 빠르게 씻고 나와서 생각보다 빨리 내 차례가 왔다.

다 씻은 후에는 그날의 길이 잔뜩 묻어있는 옷 빨래를 하면 오늘 해야 할 일이 끝난다.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는 무료로 세탁기를 돌릴 수 있어 처음으로 세탁기를 사용했다. 이미 가득 채워진 빨랫줄을 이리저리 살펴가며 옷을 널고 마을 구경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입구에서 또 다른 한국 분을 만났다. 서로 할 것이 없어 같이 길을 나섰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인시만 나눴던 분인데 제대로 된 이야기를 처음 나눌 수 있었다.


평소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다며 여기서 자전거를 구해 산티아고까지 갈 예정이라고 하셨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 중에 국토대장정과 자전거 국토종주도 있었는데 이 기회에 이것저것 궁금했던 것을 열심히 물어볼 수 있었다.






















투우장처럼 보였던 건물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스페인의 풍경이 신기하다. 다른 유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순례길 위에서 처음으로 본 프랜차이즈. 평소에는 너무 많아서 존재를 몰랐다면 이제는 너무 보이지 않아서 존재를 모르겠다.


산책 중에 갑자기 비가 내려 얼른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내 빨래를 찾아 들어가는데 아직 찾아가지 않은 빨래가 보였다. 외국에서는 개인플레이(?, 이렇게 표현해야 하나!)라 최대한 남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지만 젖어가는 빨래를 보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다시 나가 다른 빨래들도 걷고 있으니 다른 분들도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걷어 주셨다. 아예 건조대를 들고 안으로 옮기기도 하고! 혼자 뿌듯해했던 부분은 도와주셨던 분들 중에 한국 분들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역시 한국인의 정이란!                                





오늘 저녁은 짜장 파스타로 정했다. 가방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는 얼른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한다. 어제 함께 저녁을 먹었던 분과 오늘 이야기를 나눈 분까지 총 4명의 몫을 만들었다. 그래봤자 오늘도 면과 소스가 전부인 조촐한 음식이다.

복숭아와 체리를 잔뜩 가져오시기도 하고 라면을 파는 곳이 있었다며 라면을 가져오시기도 했다. 아까 한 어머니 아버지께 받았다며 희귀 아이템 김치도 가져오셨다. 덕분에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라면을 먹으려는데 멀리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라면 냄새가 맡기 힘들어서 쳐다보는 줄 알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알고 보니 맛이 궁금해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앞에 앉았던 분이 “먹어볼래?” 물어보셨고 얼른 접시에 덜어 주니 맵지만 맛있다고 반응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있으니 이미 산티아고까지 다 걷고 다시 생장으로 돌아가서 2회차를 시작하려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고작 3일 걸은 나는 무사히 마친 그분이 부럽기도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직 물집 생기신 분은 없죠?”라는 말이 나왔다. 말을 해야 하나 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오늘 생기셨대요” 하고 대신 말씀해주셨다. 혹시 봐도 되겠냐는 말에 “보기에 좋지 않아서요” 하고 답하니 문제없다며 아무렇지 않게 봐주시고는 약을 빌려주셨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보고 싶지 않을 법한 것을 선뜻 본다고 하는 사람도, 당장의 아픔 때문에 그런 발을 보여주는 부끄러움을 잊은 사람도 서로 다른 의미로 대단한 것 같다.




내일은 처음으로 비가 올 예정이라고 했다. 비가 오면 신발이 젖을 텐데.. 신발이 젖으면 발가락은 어쩌지 상상해보다가 당장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을 멈췄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이전 05화 산티아고 순례길 #2. 숲과 마을이 반복되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