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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Nov 15. 2019

산티아고 순례길 #2. 숲과 마을이 반복되는 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수비리(Zubiri)/21km


오늘도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이상하다. 내가 내가 아닌 듯한 이 느낌이 낯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생장까지 이동하면서 밤을 새우고 일찍 잔 덕분에 일어나는 시간이 빨라졌나 보다.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내려가니 나갈 채비를 마친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이곳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아침 6시 전까지는 아무도 나갈 수 없다. 너무 어두울 때 시작하지 말라는, 또 너무 이른 시간부터 준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지 말자는 약속인 것이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생장행 버스에서 만났던 일본인 아주머니가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버스에서 만났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활기 넘쳐 보였다. 이게 바로 순례길의 힘인가? 다시 만난 게 신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6시가 되고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서두르지 않고 침낭과 가방을 다시 정리한 후 간단히 마들렌을 먹으니 어느새 15분이 지나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로서는 앞사람을 따라갈 생각이었지만 나와보니 다들 부지런히 떠났는지 내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잠깐 산책 나온 듯한 사람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물으니 해맑게 웃으며 나를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 가는 동안 나에게 아침은 먹었는지, 발에 물집방지 크림은 바른 건지, 시차 적응은 괜찮은지 세세하게 물어본다. 모든 게 괜찮다고 답하니 웃으며 돌아갔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토록 호의를 베푸는 길이 세상에 또 존재할까?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790km.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라 오늘 당장 걸어야 할 21km만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았다. 새소리로 가득한 숲을 혼자 걷고 있으니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던 숲 속 마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까지는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가 나오면 신기해서 카메라를 자꾸 들게 된다.



울타리 사이사이에 붙어있던 가리비.  

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자연이 펼쳐졌는데 하루 사이에 풍경이 바뀌었다. 오늘은 숲길과 아기자기한 마을을 지나는 길이 이어졌다.




이제 고작 2일차지만 순례길 위에는 동물들이 참 많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고양이의 탈을 쓴 강아지가 분명했다. 만지려고 손을 뻗으면 알아서 눈을 살며시 감고 만져주기를 기다리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10분이 지나가 있었다.



신발이 젖지 않도록 다리를 놓아주신 분을 생각하며 건넜던 다리.


 

자유롭게 쉬고 있는 동물들을 보면 정말 좋아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경계 없이 드러누워있으면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몰래 사진을 찍고 소들이 자극받지 않도록 앞만 보며 지나갔다. 긴장한 나와 다르게 소들은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익숙한 듯,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구름이 많아서 어제처럼 쨍한 일출은 아니었지만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분홍빛 여명이 아름다웠다.


길을 걷다 보면 다른 공간으로 동물들이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설치된 문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나무로 되어있었는데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평소 길 위에서 혼자 걷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동물을 만나면 겁이 난다.

고요한 숲 속에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 사이로 놀고 있는 말 두 마리가 보였다. '깜짝이야...'



숲 길이 익숙해질 때쯤 다음 마을이 나타났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가게 대부분이 닫혀있었다. 가져온 물을 다 마셔버려서 이 마을에서 물을 살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음 마을에 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곧장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다시 시작된 숲길


혹시나 발이 빠지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건넜던 돌다리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다음 마을이 있었다.




아담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열려있던 마트를 찾을 수 있었다.

목이 마를수록 충동구매를 더 조심해야 했는데... 갈증이 나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당장의 목마름을 생각하며 물 1.5L와 500ml 한 병씩, 또 음료수 한 캔을 담았다.

아직 걸어야 할 거리는 10km가 남아있었다.



마트에서 나와 곧바로 물을 마셨다. 500ml 한 병을 거뜬히 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실컷 마셔보아도 절반도 줄지 않았다. 어제저녁 배낭 무게를 줄이려 고민했는데 순식간에 2kg가 늘어난 것이다.




그래도 애써 물이 모자라는 것보다 넘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 보이는 족족 담았던 노란 화살표. 정해진 규칙이라도 있는 듯 화살표 위에 열심히 쌓아 올린 돌들이 귀여워 보였다.




물을 샀던 마을 이후로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덜 힘들지만 발을 잘못 내디디면 쉽게 다칠 수 있어서 긴장하면서 걸어내려 갔다.

그러다 마지막에 급격한 경사와 점점 아파오는 어깨에 얼른 가방을 내려놓고 싶어서 뛰어내려오듯 빠르게 내려와 버렸다.



생각보다 더 일찍 수비리에 도착했다.

오늘 지낼 숙소, 수세이아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은 1시였다. 큰 배낭만 입구에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 공원으로 향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고생한 어깨와 발을 풀어주며 30분 넘게 휴식을 즐겼다.



어딘가 모르게 정감있는 마을 수비리.



일찍 도착한 순례자 중에는 강에 발을 담그는 사람도 보였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지우!"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떠난 순례길에서 내 이름이 들리다니. 놀라서 쳐다보니 어제 초콜릿을 같이 나눠먹은 친구가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한글이름이라 외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잊지 않고 불러주니 신기함 반, 감동 반.

여기서 머물 거냐고 물어보니 너무 일찍 도착해서 다음 마을까지 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나도 다음 마을까지 이동할까 잠시 고민하다 무리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얼른 머릿속에서 지웠다.


강가에서 시간을 보내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체크인을 하니 내어주셨던 시원한 웰컴음료수 레모네이드와 예쁜 가리비 모양의 세요.

오늘의 숙소는 4인실이다. 처음에 2층 침대를 가리키길래 "혹시 1층 써도 될까?" 하고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그래도 되는데 앞으로 들어올 분들이 다 나이가 많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들어온 남아공 할머니 한 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늘도 스머프 초콜릿을 꺼내 드리니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머프라며 정말 좋아하셨다. 같이 순례길을 걷는 친구분들에게 사진을 찍어 메세지를 보내고, 초콜릿과 함께 같이 사진도 찍을 정도로 말이다.

좋아하시는 모습이 소녀같이 순수하셔서 보는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들이 오기 전까지 수영하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겠냐는 물음에 출출해서 일단 점심을 먹겠다고 말씀드렸다.

씻고 빨래를 마친 뒤, 오면서 사온 파스타 면으로 간단히 카레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은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세면도구를 넣어주셨던 감사한 분과 함께 다시 한번 카레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야채 하나 없는 면과 소스의 조합이라 살짝 부끄러웠지만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했다.

 

저녁을 먹은 알베르게에 계시던 또 다른 한국 분과 대화할 수 있었다. 오늘 생각 없이 마실 것을 잔뜩 샀다가 호되게 당했다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이번에는 이분이 내일 동키를 쓸 예정이니 물건 몇 개를 넘기라며 도와주셨다. (이 도움은 내일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된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 구름이 예뻐서 사진을 찍으니 덤으로 뒷모습을 담아주셨다.

방으로 돌아오니 아까 인사를 나눴던 할머니의 친구분들이 모두 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네가 스머프 초콜릿을 준 사랑스러운 친구구나!"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자기 전까지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수세이아 알베르게에서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방이 우리 방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은 것을 다시 한번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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