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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Nov 15. 2019

산티아고 순례길 #1. 아직은 어색한 "부엔까미노'"

생장(Saint-Jean-Pied-de-Port)-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27km


                     


잠귀가 어두운 탓에 알람 10개를 맞춰 놓으면  9-10번째에서 겨우 일어나는 나로서는 가장 큰 걱정이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례길 첫 아침, 이런 걱정을 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눈이 일찍 떠졌다.

손목 알람이 울리기도 전, 그것도 모두 자고 있을 시간에 말이다.


너무 일찍 움직이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 싫어서 누군가 일어나면 같이 일어날 생각으로 누워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시 잠들 것 같아 어제 생장까지 오면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찍었던 사진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고작 하루 전인데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아 신기했다.


그러다 누군가 부엌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조용히 따라나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으로 따듯한 율무차와 빵 두 조각. 더 많이 먹을 수 있었지만 괜히 많이 먹었다가 불편할 것 같아 애써 자제했다.




가방을 정리하고 떠나려는 나를 보고 어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분이 "자리 많이 남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하고 물어보셨다.  


순례길에는 배낭을 목적지까지 옮겨주는 동키 서비스가 있다. 어제저녁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분 모두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동키를 이용하겠다는 말에 '나도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고 미리 배낭을 보낼까..?'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직접 옮겨보지 않고는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를 것 같아서 "아직 고생을 덜해봐서 내일 해보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몇 시간 뒤의 미래를 모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마지막으로 물어봐주셨고 나는 세면도구와 충전기를 맡겼다. (못해도 1-2kg는 되었을 것인데 나중에 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가면서 마실 물 2병과 어제 산 간식거리를 넣고 나니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6시 15분의 생장 풍경, 아직 켜져 있는 가로등 덕분에 무섭지 않았다.



어제 수많은 순례자들이 가득했던 거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작은 다리를 걷고 있으니 프랑스 작은 마을 콜마르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언니와 아침 일찍 나와서 마을을 걸어 다녔던 날이 떠올랐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따라 쭉- 직진하니 갈림길이 나왔다. 어제 순례자 사무소에서 이 루트로 가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인지. 문득 화살표만 따라가면 도착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론세스바예스까지 핸드폰을 보지 않고 화살표와 걷는 사람들만 보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순례길 위에서 처음으로 만난 동물은 말이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오랜만이라 살짝 긴장이 되었다. 저 얇디얇은 철사가 정말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걸까? 자유롭게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말은 무슨 생각을 할까?





눈앞에 보이는 산이 점점 빨갛게 변해갔다.

첫날부터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설레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날 일이 없으니 이런 풍경은 늘 일몰 전에만 볼 수 있었는데.

온 세상이 노릇노릇 참 예뻤다.



산과 산, 구름과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빛이 아름다워 넋 놓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약 30분 후 일출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뜨고 나니 더 노릇노릇 구워지는 풍경들이 눈에 담겼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르막에 숨이 차다가도 고개를 들면 이런 멋진 풍경이 보여서 힘이 났다. 또 마음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풍경을 보고 이토록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었나?

왜 나는 이렇게나 감동을 받았던 걸까? 왜 행복을 느꼈을까?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머릿속은 이런저런 질문으로 가득 찼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두려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힘든 길, 그 와중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이 모든 게 동시에 존재하던 순간이기에 감동도 행복도 느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말을 지나치고 얼마 후, 이번에는 양 무리를 만났다. 열 맞춰 뽈뽈뽈 걸어가는 양들이 귀여웠다.


점점 멀어지는 양들을 보며 갑자기 양이 부러워졌다. 동네 마실 나오는 곳이 피레네 산맥이라니!

양을 부러워하긴 또 처음이다.


양을 몰며 올라가는 양몰이 개와 주인의 뒷모습이 그림 같다.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났을 때 말로만 듣던 오리손이 보였다.



오리손까지 걸어오면서 생각보다 훨씬 정말 많이 아주! 힘들어서 '이래 가지고 800km 다 걸을 수 있을까..? 돌아가려면 지금 돌아가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 오리손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쏙 사라졌다.

오리손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며 잠시 쉬려는 찰나, 혼자 온 순례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아 사진을 찍어드렸다.


갑자기 다시 생기는 힘에 잠시 풍경을 구경하다 출발했다.

연두색 떡에 하얀 깨를 뿌려놓은 것 같다.


 

하얀 소는 또 처음이네!



정말 힘들어서 못 걷겠다 싶을 때 항상 평지가 나왔다. 이런 것도 다 계산해서 길을 만들어 놓은 걸까?

어느새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내 그림자가 보였다.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그림자지만 마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늘따라 반가웠다.  



그렇게 걷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차 몇 대가 동시에 올라오더니 우르르 사람들을 내려주고는 다시 내려갔다.

그중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었고 그대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덕분에 조용했던 길 위가 활발해졌다.                                




연두색 떡에 하얀 깨.







멀리서부터 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내가 만약 저 차에 타고 있다면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다행히 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 앞에서도 여유로운 말들.

아무런 경계 없이 말은 말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돌아다니는 이곳이 낯설었다.

마치 어릴 적 대자연을 주제로 한 동화책 속에 똑하고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오리손을 떠난 지 딱 2시간 만에 이번에는 푸드트럭을 만날 수 있었다.



푸드트럭을 보면 멈춰서 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지칠 때쯤 나타난 푸드트럭을 보고 또 힘이 나고 신이 나버렸다. 잠시 멈춰 고민하다가 곧바로 출발했다.



그렇게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오르막길, 그리고 오르막길을 가리키는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아직도 오를 곳이 남았다는 사실에 (헛) 웃음이 나왔지만 "론세스바예스까지 9.9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생장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오리손에서 머무르지 않는 이상 첫날 27km를 걸어야 한다.

평소 많이 걸어봤자 5-10km 내외기 때문에 얼마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거리가 9.9km밖에 남지 않았다니!



그리고 방금 오르막길을 오르자마자 보이는 평지에 철퍼덕 앉아 쉬었다. 그늘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으니 예뻤던 풍경이 더 예쁘게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는 물도 마시고 가져온 간식도 먹으며 다시 걸어갈 힘을 충전했다.


푹-쉰 후 다시 가방을 메려 일어날 때, 문득 주인을 잘못 만나 4시간 반 만에 서야 휴식을 얻은 등에게 미안해졌다. '10km만 더 부탁해.....'



점심이 될수록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그리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아무래도 높은 곳이라 그런 걸까? 모자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보려 했지만 바람 때문에 자꾸 가려지는 시야가 답답해서 모자를 벗을 수밖에 없었다. 걸으면서 최대한 노래를 듣지 않으려 했는데 점점 세지는 바람 때문에 지쳐가는 몸을 위해 음악의 힘을 빌렸다.  




그리고 드디어 나타난 그늘과 내리막길!


"올라! 부엔 까미노" 외쳐주시고 유유히 지나가셨던 아저씨.


스페인 인사를 듣고 나서야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직은 "부엔까미노" 하고 답하는 게 어색하기만 하다.


다시 앞뒤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잦아든 바람과 시원한 나무 그늘 덕분에 다시 이어폰을 빼고 주변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걸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걸어서 발이 피곤해질 때쯤 딱 나뭇잎이 쌓여있는 길이 나왔다.


걷기는 쉽지 않았지만 푹신푹신한 느낌이,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또 여름인데 가을에 걷고 있는 기분도 살짝 들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심심할 때쯤 지나가 주는 말들.

 

오르막길도 없고 그늘도 생겼겠다 다시 여유가 생길 때쯤 곳곳에 붙어진 작은 노란 화살표가 궁금해졌다.


표지판으로 잘 세워진 것은 나라에서 만들었겠지만 울타리, 나무, 바닥 곳곳에 보이는 화살표는 누군가가 따로 달아놓은 것 같았다. 이 화살표는 후반부부터 더 자주 등장(?) 해서 앞에 따라갈 사람이 없어도 길을 찾기가 편했다.


자신의 짐을 지고 걷기도 버거운 이 길을 하나하나 망치질을 하며 걸었을 누군가가 대단했고 감사했다.


화살표를 잘 따라가다가 다시 보이는 사람들이 반가워서 사람들을 따라갔다.


우르르 오르막길을 올라가길래 따라 올라가니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다 올라가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론세스바예스가 어느 쪽인가요?" 여쭤보니 여기가 아니라며 내 손을 잡고 내려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주셨다.


오늘도 민망함에 씩 웃으며 감사 인사를 드리고 후다닥 내려왔다. 어제 했던 실수가 떠올랐다. 이러다 1일 1실수 공식이 굳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알려주신 방향으로 내려오니 다시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아까는 왜 이걸 보지 못했을까?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같다.



다시 한적해진 길을 걷다가 쉬고 계신 한국인 두 분이 보였다. 반가움에 인사를 드리니 "론세스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한 1-2km 남았나? 힘내요!" 하고 말씀해주셨다.


처음에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과 남은 거리를 듣고 힘이 났다. 하지만 '이 정도면 1-2km는 넘은 것 같은데..'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알베르게에 점점 발걸음이 느려졌다.



거리를 모른 채 걸었던 초반 5km보다 알고 걸은 1-2km가 더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남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걸었을 때가 훨씬 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걸은지 7시간 만에 드디어 론세스바예스가 보였다.


다 도착해놓고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보이는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다 앞에서 똑같이 헤매고 있는 스페인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눈치껏 따라가니 마당에 앉아 쉬고 있는 많은 순례자들이 보였다. 체크인 시간인 2시까지 30분이 남아 나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다시피 앉았다.



내 왼쪽에는 미국, 오른쪽에는 스페인 친구가 앉았는데 어색함을 깨기 위해 가방 속 초콜릿을 꺼냈다.

뜨거운 햇빛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아버렸지만 지금까지 먹었던 초콜릿 중에 가장 맛있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말없이 웃으며 각자 세 개씩 더 입에 넣었다.


확실히 친해질 때는 간식이 최고다. 덕분에 2시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친구랑은 초반에 길 위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일찍 도착할 자신이 없어 미리 예약하고 갔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2시가 되어 체크인을 하고 들어왔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올라오니 날 기다리고 있는 162번 2층 침대.

내일은 1층이길 바라며 가방을 풀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동전을 넣으면 사물함을 열쇠로 닫을 수 있어서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아침에 맡겼던 세면도구를 기다리며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스페인어 책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정독하다가 중간쯤 읽고 나서는 조용히 닫았다. 이태리어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이름 묻는 표현과 대답하는 부분은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세계여행을 하다가 사 오셨다는 초콜릿을 받았다. 아낌없이 주셔서 입안이 금방 달달해졌다. 안에는 커피가 들어있던 신기한 초콜릿이었다.


씻고 빨래를 마친 후, 조금 일찍 저녁을 먹었다. 이른 시간이라 부엌에 아무도 없어서 편하게 끓일 수 있었다. 물이 끓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었던 게 기억난다. 라면을 보고 좋아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가만히 누워있던 몸이 하루 종일 움직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라면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나갔다.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보였다.



마지막에 봤던 작은 개울을 보고 깨달았다.

‘론세스바예스 주변은 이게 전부구나!’


산책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빨리 끝났다.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면서 버릴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냉장고 바지가 3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마침 필요한 분께 드렸더니 선크림을 내어주셨다. 무게를 줄이려다 더 든든해졌지만 서로 가져온 물건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돌고 도는 게 신기하기도 재밌기도 했다.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순례길 첫날.

다친 곳 없이 생각보다 말짱하게 끝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앞으로 보게 될 예쁜 풍경에 설레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과연 내가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 의문이 가득했지만 예쁜 풍경을 보고 나니 이 길을 차근차근 다 걸어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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