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saint jean pied de port)
버스에서 내리니 보였던 마을 입구.
어디로 가야 하는지, 순례자 사무소가 어디에 있는 건지 잘 알지 못했다.
순례길 위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어떤 길이 나오는지 모르고 가야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는 말에 계획하기 귀찮았다는 속마음을 숨겨본다. 그래서 'God의 같이 걸을까'도 2화를 보다 멈췄고 한국에서 반응이 좋았던 예능 '스페인 하숙'도 보지 않았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은
1. 도착하면 순례자 여권을 만들고 도장을 모아야 한다.
2. 처음 3일의 숙소: 생장-론세스바예스-수비리
3.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4. 만나는 사람에게는 "부엔 까미노!"
'하루 전 날 알아보고, 걸으면서 주워듣고 그러다 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
아기자기 작고 예쁜 마을이었던 생장.
사람들을 따라갈 생각으로 버스에서 내렸는데 다들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께서 인포메이션 센터는 이쪽이라며 먼저 앞장서 주셨다.
예쁜 풍경에 잠시 보다 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지나갔던 다리
순례자 사무소 가는 길
약간의 오르막을 올라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한산했다. 인자하신 할아버지께서 순례자 여권 발급을 도와주셨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체크하고 여권에 내 정보를 맞게 기입하면 되는 간단한 과정이다. 여권의 빈칸을 다 채우고 기다리니 할아버지와 내 옆자리 아주머니가 날 빤히 쳐다보셨다. 다시 내려다보니 출발 달을 잘못 적은 게 보였다.
멋쩍게 웃으며 얼른 다시 적었다.
찍찍 그은 자국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시작부터 덜렁대다니.
처음으로 세요를 받는 순간.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어서 슬쩍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니 다시 제대로 찍으라며 자세를 잡아주셨다. 반복되는 안내에 지치실 법도 한데 한 명 한 명 정성껏 안내해주시는 게 느껴져서 감사했다. 알베르게 정보가 빼곡한 종이와 내일 당장 넘어야 하는 피레네 산맥 지도를 받고 설명을 들으면 정말 끝이다.
기부함에 1유로를 넣고 그라데이션이 예쁘게 들어간 하얀 가리비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주섬주섬 가방을 메니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해주셨다.
여권을 함께 발급받았던 일본 아주머니는 쿨하게 "내일 보자!" 하시며 자신이 예약한 숙소로 떠나셨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120% 있어 보였다.
문에 적힌 숫자를 따라 걷다 보니 55번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체크인 시간까지 2시간이 남아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좀 쉬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바닥에 앉았다.
그러다 잠시 후 오신 분이 문 앞에 가방을 세워 두시고는 떠나셨다.
누가 가져가면 어쩌려고.. 갑자기 저 가방까지 지켜야겠다는 정의감이 생겼다.
그리고 딱 10분 후, 나도 슬금슬금 저 가방 옆에 내 가방을 내려놓고 마을로 향했다.
아까 제대로 보지 못했던 마을 초입으로 가는 길.
입구부터 다시 차근차근 걸으며 2시간 동안 느긋하게 마을 산책을 했다.
순례자도 많았지만 가족단위로 여행 온 사람들도 많이 보였던 마을.
기념품 상점을 보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나도 모르게 모을 마그넷과 언니 엽서를 사게 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끝까지 무사히 챙길 자신이 없어 꾹 참았다.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모양이 거리마다, 가게마다 가득했다.
체크인 시간 20분 전,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아까와 다르게 사람들이 꽤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내 앞에 가방을 놓으신 분도 한국 분이셨다. 먼저 기다리고 있었으니 먼저 체크인 하라며 챙겨주셔서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었다.
한 공간에서 다 같이 자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가장 안 쪽의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침대 바로 옆 창문으로 보인 풍경이다. 초록색 산과 그 아래 자리 잡은 붉은 지붕들이 한눈에 담겼다. 잠시 바라보다가 밤새 이동하면서 달라붙은 피곤을 얼른 털어내고 싶어서 가장 먼저 샤워실로 직행했다.
씻고 나서 곧바로 손빨래를 했는데 거울로 보이는 내 모습이 정말 어색했다.
‘순례길이 끝나고 나면 익숙해지겠지’
빨래를 널고 이번에는 바로 앞 언덕으로 향했다.
알록달록한 빨래들 사이에서 잘 걸려있는 내 빨래.
올라갈수록 사람이 줄어들고 새소리만 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복작복작한 프라하에 있었는데 갑자기 바뀐 상황이 어색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좋았다.
햇빛을 가득 담은 나뭇잎도 참 예뻤다.
오랜만에 생긴 여유로움이 좋았다. 덕분에 카메라를 가지고 실컷 놀았다.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기 전에 미리 내일 장을 봐 둔 나를 칭찬하며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얼른 가방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가방 안의 음식을 비우기로 했다. 라면은 정말 힘들 때 먹어야 하니 아껴두고. 만만한 햇반과 고추장을 꺼냈다.
나름대로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니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시간.
침낭 속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다들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챙겨 온 작은 수첩에 이것저것 적어보다가 '꾸준히 적을 내가 아니지!' 하며 다시 닫았다.
그렇게 다시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좀 전에 내일 숙소의 예약 날짜 변경을 도와드렸던 분이 같이 과일 먹지 않겠냐며 불러주셨다. 나가보니 과일, 빵, 간식, 주스가 가득했다. 그냥 얻어먹기 죄송해서 조용히 내일 먹으려 했던 마들렌을 꺼내왔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다.
세계여행을 하다가 오신 분, 혼자 외국여행을 도전하신 분. 우리 셋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눴고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내일 걸을 지도를 한 번 더 쳐다보고 곧바로 잠들었다.
내일부터 정말, 정말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