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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Nov 05. 2019

1년 간의 교환학생을 마치고, 프라하에서 생장가는 길

어제 막 기숙사에서 짐을 정리했는데 바로 순례길 짐까지 싸려니 하루가 정말 짧았다.  숨 쉴 틈 없이 바빴던 최근 일주일을 돌아보며 '뭐가 급해서 이렇게 바로 떠나는 티켓을 끊었을까?' 싶었다.

아마 그때는 지금쯤이면 모든 절차를 다 끝내고 여유를 부리고 있을 줄 알았나 보다.






순례길 준비물

약 40일을 함께할 내 짐

순례길 준비물: 45L 가방, 여권, 지갑, 등산화, 슬리퍼, 침낭, 일회용 우비 2장, 모자,  핸드폰, 충전기, 보조배터리, 이어폰, 카메라, 접이용 가방, 손톱깎이, 빨래망, 빨래집게, 지퍼백, 김장비닐, 볼펜, 젓가락, 숟가락, 세면도구, 선크림, 스포츠 타월 2장, 기본적인 약, 바람막이, 긴팔 2장, 반팔 2장, 긴바지 2장, 반바지 1장, 양말 4켤레, 속옷, 약간의 음식 등

이것저것 넣고 빼고 들어 보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가방을 꾸렸다. 최대한 간소하게 챙기려 했지만 물건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넣고 무거우면 버리지 뭐!'  







프라하에서 생장까지 이동 경로


먼저 나보다 복잡하게 가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총 4번의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1. 프라하-마드리드 (항공) 1시간 15분, 19유로


2. 마드리드-사라고사(버스) 3시간 30분, 17유로


3. 사라고사-팜플로나(기차) 1시간 7분, 16유로


4. 팜플로나-생장(버스) 1시간 45분, 22유로



밤 10시부터 이동하기 시작해서 다음날 낮 12시쯤 도착했으니 환승 시간까지 꼬박 14시간이 걸렸다. 생장까지 한 번에 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환승이 필요했지만  낮 시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 이동하는 거 밤에 이동하고 낮부터 푹 쉬자는 생각으로 생장에 최대한 일찍 도착하는 교통편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위 방법이 최선이었다.






이것저것 다 넣은 결과 공항에서 가방 무게는 9.9kg

순례길 가방의 적정 무게로 보통 자신의 몸무게 1/10을 추천한다고 하는데 거뜬히 넘어버렸다. 곧 사라질 라면과 햇반, 친구들이 넣어준 간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위탁수하물로 보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들어갔던 입구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40일 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지?' 아마 이렇게 오래 떠난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밤 10시 비행기인데 아직도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





마드리드행 비행기 안

덕분에 일몰을 하늘에서 봤다. 마침 딱 창가 자리라 TV 보듯 구경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이런 풍경을 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만 봤을 텐데 이날은 달랐다. 앞으로 내가 겪을 이런저런 일들을 상상하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정확히 예정된 시간에 마드리드 T1공항에 도착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를 들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나 혼자구나.' 싶었다.
어젯밤에 꾸벅꾸벅 조는 친구들 사이에서 끝까지 본 영화 '모아나'가 떠올랐다. 마침 본 영화가 나에게 필요한 영화여서 감사했다. OST를 흥얼거리며 씩씩하게 마드리드-사라고사 버스를 타는 곳, T4터미널로 이동했다.

 

T1에서 T4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한다. 처음에는 T2, T3밖에 없어서 당황했지만 걷다 보니 T4가 나왔다.


아직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 미리 정류장을 확인한 후에 쉬는 시간을 가졌다.

20분 늦게 온 버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당황했는데 덕분에 말동무가 생겼으니 고맙기도 하다.


졸음을 참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스페인 아저씨가 내게 오더니 말을 걸었다.


"안녕, 순례길 가니?"


생장까지 순례길 복장으로 가기 아직은 부끄러워서 나름 여행하러 온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버릴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가방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신은 발목까지 오는 등산화와 내 몸만 한 가방이 아무래도 티가 났나 보다.



“응, 너도 순례길 가니?”



나도 그에게 물었다.

자신은 레온에서 시작할 예정이라며 출발 지점이 다른 것을 아쉬워했다.  출발지는 다르지만 같은 목적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이미 순례길을 완주한 경험이 있는 그는 내게 이것저것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신발이 너무 두껍지 않니? 여름에 걷기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데”, “가방이 너무 큰 것 같아”, “생장까지 어떻게 가는지 아니?”


순례길이 처음이라는 학생이 걱정되어 이것저것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퀴즈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향한 질문들이 잔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넌 거기에 갈 준비가 너무 미숙해’



처음부터 척척 잘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부족하고 말고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걸으면서 알게 되겠지.


버스에서 쪽잠을 자니 금방 역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스페인 아저씨와 버스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남은 기차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역 안에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오랜만에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쩜 타이밍을 이렇게 잘 맞췄는지. 덕분에 기숙사 방 청소 검사를 2번이나 실패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한국에 가면 보자는 말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때 아까 헤어진 아저씨가 다시 말을 거셨다.

"너 기차 어디서 타는지 아니?"

"여기서 타는 거 아닌가요?!"

버스에서 내려준 역으로 들어가면 건너편에 떡하니 기차가 보여서 당연히 여기서 타면 되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아저씨는 울타리를 가리키며 "여기로는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하셨고 그제야 울타리를 넘는 방법 외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차는 위로 올라가야 한다며 내 기차 플랫폼까지 확인시켜 주시고는 다시 유유히 떠나셨다.



하마터면 시작부터 삐끗할 뻔했다.  

무사히 스페인 기차 렌페(renfe)를 타고


이른 시간이라 텅텅 빈 기차 안에서 여유롭게 이동했다.

기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이 따스해서 창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또 다른 친구가 전화를 줬다. 내가 오늘 이동하느라 지루하다는 게 어디 기사라도 난 건지!
역시 이야기보따리 가득 풀며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사라고사에서 팜플로나까지 알사 버스를 타고 오면 편했을 것을.. 괜히 기차를 선택해서 기차역부터 버스정류장까지 다시 이동해야 했다.


버스를 타고 가거나 30분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날도 좋으니 걸어가 보기로 했다.

점점 올라오는 태양에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넣고 열심히 걸었다.



생각보다 컸던 터미널. 이 곳에 오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순례자들이 많이 보였다. 저마다 각자의 이유와 각자의 짐을 들고 모였지만 목적이 같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드디어, 약 12시간 만에 생장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서 내 옆에 한 아주머니가 앉으셨다. 어디에서 오셨나고 여쭤보니 일본에서 오셨다고 했다. 알고 있는 일본어 문장으로 인사를 드리고 내 소개를 하니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며 자신을 소개하시고는 발랄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일본어와 영어도 아닌 그 중간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성격이 어찌나 유쾌하신지 가는 내내 즐거웠다.


날씨가 예술이었다. 바깥으로 햇빛을 받은 노랑 연두색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가끔 밖으로 보이는 순례자들을 볼 때면 내일부터 저 사람들 사이에서 걷고 있을 내가 상상되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약 1시간 40분 후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길었던 밤을 무사히 보내고 드디어 생장에 도착했다.

생장(saint-jean-pied-de-port)

내일부터 정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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