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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Dec 03. 2022

도깨비 엄마가 부처가 된 이유

불편한 용서의 길을 걷다

초등학생 때 아주 무서웠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열두 살 무렵 나는 엄마가 사준 긴팔 셔츠를 반팔로 입고 싶어서 몰래 셔츠의 팔을 잘라서 입고 다닌 적이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자른 팔 조각을 엄마에게 들켜버렸다. 엄마는 무서운 도깨비 얼굴이 되어 옷걸이를 쥐고 나를 마구 때렸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엄마의 모습은 도깨비는커녕, 반 부처 같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얼굴에는 무서운 도깨비의 잔상이 흐려졌다. 어떻게 그렇게 바뀌게 된 걸까. 궁금해져 엄마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엄마 옛날엔 진짜 무서웠잖아. 근데 어떻게 하다가 지금 이렇게 온화해진 거야?"

 엄마는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슬쩍 대답했다.

 "내가 어찌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내가 어찌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어릴 때 나와 언니들이 집을 마구 어지르면, 엄마는 그만 좀 어지르라며 우리에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치우면 또 어지르고, 또 어지르고. 반복에 반복이니 답답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식들도 함께 사는 집인데, 어떻게 자신의 방식만 고집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자녀교육방식 차이에 따른 아빠와의 갈등도 있었다. 엄마는 방목형 육아, 아빠는 엘리트형 육아를 추구했다. 엄마는 시골에서 팔 남매로 가난한 시절을 보내며 자랐기에 방목형의 육아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고, 엄마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도 그러했다.

 반대로 아빠는 삼 형제에 장남으로 자랐기에 한 턱이 있고, 태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소중한 자식들에게도 무엇이든 최고를 선물하기를 바랐다.


 이는 마치 MBTI에서 S와 N의 차이랄까. 엄마는 뭐든지 정말 현실적이었다. 결코 내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매일매일 가계부를 쓰며 생활비를 관리했고 교육비 저축까지도 빼먹지 않았다.

 반면 아빠는 비틀스를 즐겨 듣고 재즈를 공부하는 멋쟁이 신사였다. 이번 달은 어떻게 장을 보고 얼마를 저금하나 머리를 굴리는 엄마 옆에서, 아빠는 때때로 비싼 나무 화분을 사 오거나 명품 안경을 맞춰 오기도 했다. 상당 부분 가족의 경제 상황에 맞지 않는 지출이었다.

 아빠는 직장인으로 일했고, 엄마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처럼 일하면서 자식들도 함께 돌보았다. 라이프 스타일의 극명한 차이처럼, 둘은 너무도 달랐다. 교육 방식의 차이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루는 내가 감기에 걸려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아빠는 몸져누워있는 나를 보고, 엄마를 엄청 혼냈다고 했다. 왜 애를 감기 걸리게 했느냐고. 아니, 애 혼자 놀다 와서 걸린 감기에 엄마가 어찌하랴. 엄마의 입으로 수십 번도 넘게 들은 에피소드다. 왠지 그렁거리는듯한 엄마의 눈동자에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억울한 감정이 어제의 일처럼 남아있었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참는 게 아름다워." 어느 날 흘려들은 엄마의 한 마디. 엄마는 수용하는 법을 배워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엄마는 매 순간 맞서 싸우는 무서운 도깨비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부처님이 되어갔다.


 엄마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가족의 모습을 용서해야만 했다. 방을 마구 어지르는 어린 자식들을 용서해야 했고, 정반대의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하는 아빠를 용서해야 했다.

 내가 비건이 된다 했을 때도 엄마는 다시 불편한 용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따지기도 했다.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강요하면서 나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러나 엄마는 결국 나의 결정을 존중해야 했다. 마치 엄마가 던진 말처럼, 세상엔 어찌해도 안 되는 게 있었다.


    '내 방식이 옳다'는 지극히도 편안한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 그것이 바로 용서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오롯이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들이 집을 좀 어지르면 뭐, 안 되는 거야?

남편이 명품 안경 하나 사면 뭐, 안 되는 거야?

얘가 비건이 된다고 결심하는 게 뭐, 안 되는 거야?


...



 순간적으로 치미는 강렬한 감정을 견딘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엄마의 오래된 기억의 서랍에는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들이 더 많을 것이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경험과 감정들까지도 잊은 채 살지도 모른다.

 육십 중반을 현역으로 달리는 엄마를 지긋이 바라본다. 둥근 얼굴형은 겨울철의 울 머플러처럼 푸근하고, 미소는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온화하고, 밝은 갈색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가을 낙엽처럼 사연 깊다. 어딘가 거친듯해 보여도, 인생의 모든 계절을 이해하고 품는 그런 얼굴. 나는 그런 부처 같은 엄마의 얼굴이 정말로 좋다.




용서는 삶에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에 저항하면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고
에너지 흐름이 제한되며,
그 결과 육체적인 질병이 생기곤 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용서하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힘을 되찾게 됩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12월 10일 토요일,

텀블벅에서 공개되는 <뜻밖의 글쓰기 여정>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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