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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Dec 15. 2022

편지를 쓰는 마음

나의 오랜 답장 욕망의 역사, 그리고 아빠의 옛 편지

요즘 만나는 소중한 인연들에게 종종 편지를 쓰고 있다. 완연한 디지털 네이티브 시대에 손편지라니 조금은 쓸모없기도 하고 필요 이상으로 낭만적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얼마 전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던 작가 동료가 엽서를 건넨 적이 있다. 세계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으로 직접 만든 엽서였다. 그때 받은 감동은, 무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달콤함이었다.

    그래서 문득 나도 이런 감동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인생인데 순간의 인연이 닿을 때 바로바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편지를 쓰는 일에서 멀어졌는데 아마도 쑥스럽다는 감각이 발현되던 사춘기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머리 둘레가 커갈수록 낯간지러운 단어를 나열하는 게 다소 민망한 일이 되어갔다.

    한편, 나의 마음을 전했을 때 진심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움이 늘어난 탓도 있었다.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정성껏 준비한 생일 선물이라도 받는 친구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었다.


    편지뿐만 아니라 마음이든 선물이든 뭐든 주는 것에 멀어지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주는 만큼 받고 싶은 애달픈 마음이 나를 자꾸만 실망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라고 '집착 없이 베푸는 마음'을 뜻하는 말도 있던데, 나는 애석하게도 부처님이 아니었기에 준 만큼 받지 못하면 쉽게 실망하곤 했다.



주는 만큼 받고 싶은 애달픈 마음이 나를 자꾸만 실망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무렵 나는 아빠와 언니들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이때 엄마에게는 그다지 편지를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약간은 쪼잔하다. 엄마는 절대 답장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좁은 마음이었지만 답장을 받겠다는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매번 편지 끝에 추신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p.s. 답장 꼭 써줘!"


    가끔 답장이 오랫동안 미뤄질 때도 있었는데 나는 불굴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하루는 답장이 뜸한 언니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추신했다.

    "p.s. 저번 편지 답장은 언제 써 줄 거야?"

    "p.s. 언니야는 답장 두 번 써줘야 돼!"


    기대하는 마음이 여러 번 좌절되면 자연스레 희망에서도 멀어진다.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친구와 함께 놀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하고, 인터폰을 울려보고, 그것도 안 되니 직접 찾아가 대문을 두드려보는 정성에도 친구는 매번 부재중이라는 소식을 듣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었다.

    그렇게 답장이 감감무소식이 되면서 편지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들었다.




    최근에는 음악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엽서를 썼다.

    마음을 글로 전하고 받는 것이 기분 좋기도,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한 몽글몽글한 분위기에서 한 동료가 푸념하듯 말했다.

    "이진씨는 주변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은 게 부러워요. 저는 사람들한테 진짜 관심이 없어서 이런 거 못하는데..."


    아차 싶었다. 아, 사실 나도 되게 관심 없는데. 그의 말을 듣고 오히려 편지는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에 쓰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편지 이야기는 아빠에 대한 기억으로 흘러들어 간다. 아빠도 한때 가족들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그리고 그때는 아빠가 가장 우리의 관심이 고팠을 때였다.


    아빠는 살아생전 알코올 중독으로 오랫동안 가족을 힘겹게 했다. 평소라면 인자하게 웃는 얼굴도 술을 마시면 180도 달라졌다. 가끔은 가족들을 해하기도 했다. 충분히 편안해야 할 집에서 아빠의 술 문제로 인해 자주 언성이 높아졌다.

    얼마 후 아빠는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부터 아빠의 집착스러운 편지 소동이 시작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 우체통이 채워졌다. 어느 날은 엄마에게, 다음 날은 언니들에게, 그다음 날은 나에게 쓴 편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보지 않고 버리지는 않을까 봉투 뒷면에는 커다란 별을 몇 개 그려놓기도 했다.

    아빠의 이전 행동으로 인해 상처와 아픔이 큰 가족들은 편지를 보기는 해도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빠의 집념은 우리의 답장 유무와는 관계없었다.

    그때 아빠에게서 받은 편지의 일부는 오래된 책장에 꽂혀 있는데 나는 가끔 그것을 펼쳐본다. 그리고 아빠가 얼마나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려 노력했는지 한참 들여다보곤 한다.


    아빠는 신문이든, 잡지든, 중독 치료 책이든, 활자로 펴낸 무엇이든지 유익한 내용이 있다면 전부 모으고 모았다.

    이를테면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클래식 음악은 무엇인지, 부모님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에 관해 부지런히 기록했다. 이렇게 긁어모은 유익함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는 분당 60박자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바로크 음악은 심장 박동수와 뇌파를 낮추는 데 이상적이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정신을 보다 냉철하고 맑게 해 준다."


    "엄마나 아빠와의 대화에서 절대적으로 논리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모를 공감해주고 동조해주고 진정으로 인정해주는 대화, 그런 면에서 부모님과의 대화에서는 1:2:3 대화 원칙을 활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란다. 한 번 말하고 두 번 듣고 세 번 맞장구쳐라는 것이다."



    아빠는 자신이 못다 한 부모 됨의 실마리를 다른 누군가가 쓴 활자에서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베껴 쓴 그 글들은 아빠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그런 아빠의 행동이 미련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우리에게 편지를 쓰며 잠시 동안은 참 행복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전쟁 시절 총 대신 펜을 들었던 시인 윤동주처럼, 아빠는 자신의 어리석은 부모 됨에 대한 부끄러움을 남이 쓴 유익함에 대한 기록으로 덮고 또 덮어냈다.




    아홉 살 시절 밀린 답장 빚은 그제야 탕감된 것일까.

    편지를 읽으며 아빠에 대한 못난 기억들을 떠올려보면서도, 현실적인 성격의 엄마가 채워주지 못했던 감정적 욕구를 채워주던 아빠의 말들에 한편 위로받기도 한다.


    나를 "무지개보다 더 좋은 수채화 물감 같은"이라고 표현하던 아빠의 글씨를 볼 때면 문득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다.

    아빠는 내가 태어난 날에도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후덕한 인상이며 사랑스러운 마음가짐을 가진 나의 집사람은 항시 보아 너그럽기 한량없소."


"나에게 힘을 주며 용기를 넣어주고 거짓 없는 웃음 띄우는 자태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오."



    이걸 받은 현실주의자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몰라도.




    시간이 흘러 다시 편지를 쓰는 마음이 되어간다. 답장에 목매던 아홉 살 무렵의 애달픔으로부터도 성숙해진 상태로.

    편지를 쓴다는 건 이미 그 과정에서 제 몫을 다하는 것이다. 쉽게 흐려지는 마음을 활자로 꾹꾹 눌러 새긴다는 건 종종 손이 저리면서도 영영 가슴 따뜻해지는 작은 베풂이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도 추억을 들춰볼 수도 있고 말이다.


    편지를 받는 마음이 따뜻하다면 주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따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운이 좋아서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받아준다면 받아주었음에 두 번 감사한 일이다.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의 작은 실천으로써 부지런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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