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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Nov 15. 2022

사랑하지 않으면 다치게 된다

세 살 아이를 돌보며 느끼는 것들

세 살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한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봤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은 다른 여타 아르바이트보다 왠지 잘 맞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는 생업이다.

    그럼에도 일은 일이기 때문에 항상 밝은 면만 있는  아니다. 적성에 맞고  해낼  있다고 해도 시련은 항상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에게 그런 고비가 바로 어제였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왠지 시련은 더해져 가는 것만 같다.


    어제는 아이와 단둘이 키즈카페에 가는 미션이 주어졌다. 항상 집에서 보호자 한 두 명과 함께 돌보았는데, 처음으로 오랜 시간 혼자서 아이를 보았다.

    처음 간 키즈카페는 모든 게 생소했다. 옆에 잘 모르는 아이들과 보호자가 있고, 새로운 장난감도 가득했다. 편안하고 익숙한 아이의 집에서 놀아주고 돌보던 상황과는 많이 달라서 나에게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키즈카페에 도착한 지 세 시간째 되는 때였다. 아이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 응가 기저귀를 갈지 않겠다고 떼를 쓰고 울며 도망갔다. 집에서도 매번 비슷하게 겪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키즈카페라는 생소한 배경에서 비롯된 불편함으로 평소보다 인내심이 더 쉽게 닳았다.

    카페 안에서는 아이의 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다른 보호자들의 흘깃대는 시선으로 스트레스는 더해졌다. 전방 500m까지 냄새를 풍기는 기저귀에, 아이의 목청 올려 우는 소리에, 흘깃대는 주변의 시선들까지. 이 모든 스트레스 상황을 뒤로한 채 겨우 아이를 수유실로 데려갔다. 기저귀를 가는 손이 덜덜 떨렸다. 들끓는 감정을 절제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이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러 키즈카페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카페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나가지 않겠다고 다시 떼를 썼다.

    여기가 좋고 재밌는데, 나가자고 하면 당연히 싫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일단 얼른 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이미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불편한 감정에 휘청대는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었다.


    아이는 카운터에서 받은 뽀로로 사탕을 받고 겨우 울음을 그쳤다. 더 이상 훈육할 힘도 나지 않아 말 몇 마디에도 쉽게 지쳤다. 이제는 퇴근 생각뿐이었다. 얼른 아이의 입에 사탕을 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머니에게 아이를 넘겨주고난 후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을 했다.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일을 하면서 부모 됨에 대해 더욱 깊게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부모가 아니지만, 잠깐 동안이나마 아이의 부모에 버금가는 보호자가 되는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부모 됨은 나처럼 일로 잠깐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겨운 인내의 고비를 겪어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이를 기른다는 건 절대로 쉽게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로스트 도터>라는 영화를 봤다. 거기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식들이란 끔찍한 부담이에요.


영화 <로스트 도터> 트레일러 사진


    영화의 주인공 레다는 부모 됨의 "끔찍한 부담"을 외면하고 두 아이와 남편을 버리고 도망간다. 아이가 다섯 살,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하지만 그는 5년 후 아이들을 다시 찾아간다.

    누군가 레다에게 물었다.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니 어땠냐고. 레다는 혼자가 되어 기뻤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로 적셔진 그의 얼굴에는 해방감과 왠지 모를 슬픔이 공존했다.


    영화 막바지에서 레다는 늦은 밤 바닷가에서 풀썩 쓰러졌다 깨어난다. 옅게 밝은 아침, 그는 딸에게 통화를 건다. 어엿한 성인이 된 딸의 목소리에 레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아이를 돌보는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제는 길에서도 보호자들의 낯빛이 더욱 눈에 띈다. 종종 기쁨에 차기도 하지만 대개는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이다.

    얼마 전 버스 안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한 보호자의 얼굴을 마주쳤을 때 든 생각이 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미워하면 자신이 가장 괴로워지기 때문에.
세상이 단번에 지옥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친다.
그렇기에 언제나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친다. 그렇기에 사랑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지쳐 집에 돌아와 큰언니에게 그날 하루의 일을 푸념했다. 아기의 응가 냄새가 아주 지독했다는 이야기에 깔깔 웃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미워졌지만, 조금은 웃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미워지는 것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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