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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May 02. 2023

영혼을 먹이는 시대

얼마나 먹을 것인가 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혼자 살고 나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먹는 게 삶에서 그렇게 큰 부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에게는 입으로 먹는 일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먹이는 일도 중요하다. 영혼을 먹이는 일이란 좋은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을 쓰는 일과 같다.

 먹는 것은 물론 살아가는 데에 중요하고도 필요하다. 음식은 우리가 하루를 살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어준다. 이 명백함과는 별개로 내가 느꼈던 것은 먹는 '양'에 대한 깨달음이다. 하루동안 음식을 그다지 많이 먹을 필요가 없다는 점, 말하자면 하루 세끼 따박따박 한 상차림으로 챙겨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가족과 함께 살 때는 무조건 세끼를 챙겨 먹어야 했다. 하지만 혼자 살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세끼를 먹는 데 연연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아침에는 간단하게 과일을 속 편하게 먹고, 점심에는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다. 그리고 저녁에는 배를 비워둔다. 위가 충분히 소화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에는 아주 가벼운 몸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반면 엄마에게 '밥'을 먹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엄마는 가난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먹을 게 없어서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55년생부터 63년생 까지를 포함하는 베이비붐 세대에게 가난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경험한 사회 분위기였다. 전쟁 이후 격변의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엄마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경제권을 갖고 있던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이후 할머니는 홀로 여덟 남매를 먹어 살려야 했다. 먹을 사람은 많은데 먹을 것은 충분치 못했다. 막내딸인 엄마를 포함한 팔 남매는 학교를 가는 대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겨우 열다섯 살이 된 엄마도 마찬가지로 공부를 포기하고 일을 했다. 엄마는 고향을 떠나 직장 근처 타지의 하숙집에 묵으며 지냈다.


 엄마가 하숙집에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집주인 할머니가 엄마에게 월세 5,000원을 더 내라고 했다. 엄마가 밥을 많이 먹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금은 억울했지만 엄마는 타협하며 주인 할머니에게 점심 도시락을 부탁했다. 도시락이라고 해도 거창할 것은 없었다. 반찬 하나 없이 딱 밥만 담은 도시락이었다. 엄마는 밥을 가득 담은 도시락을 들고 직장 동료 친구들이 싸 온 반찬을 빌어 점심을 먹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탐하지 못하는 일은 전후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깊게 자리 잡힌 서러움이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탐하지 못하는 일은 전후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깊게 자리 잡힌 서러움이었다.




 Z세대의 초입에 서 있는 나는 엄마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다. 엄마가 살던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풍요의 시대였다. 밥이 없어서 굶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직장인 아빠와 틈틈이 일하는 가정주부 엄마, 그리고 두 언니들 아래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 어떤 정보든 무한 증식되는 인터넷을 일상적으로 접했고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로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나는 풍요로운 시대의 열매를 먹으면서도, 가난을 겪어온 엄마 곁에서 자랐다. 또한 태어나기로는 IMF의 끝자락이었다. 언제든지 가난과 풍요 사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고 간접적으로라도 듣고 보았다.

 가난을 경험한 엄마의 가장 중요한 인생 법칙은 바로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국그릇에 고봉밥을 먹는 엄마를 볼 때면 마치 어린 시절 마음껏 먹지 못했던 서러움을 오늘로 채워 넣는 것 같았다. 엄마는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둬야만 했다. 오늘이 아니면 먹을 것이 없던 시절부터 품어온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21세기 풍요의 시대는 오히려 절제가 미덕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넘쳐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먹을 것도, 보고 즐길 것도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공급이 무한정일 때는 얼마나 먹을지 보다 무엇을 먹을지가 더 중요해진다. 가치 중심의 문화가 자리 잡고, 생명 윤리와 환경 문제가 대두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가    동물성 식품을 불매하는 비건식을 시작했을 ,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네가 없어봐야 정신 차리지." 나의 비건 지향 식습관은 엄마가 보기엔 단지 편식에 불과했다. 가난의 기억을 품고 자란 엄마가 이해하기로 음식을 이것저것 가리는  사치에 가까웠다. 없어서  었던 엄마가 보기에 고기를 골라내는  모습은 아주 못마땅하게 보였다.

 가난한 시대를 살아온 엄마와 풍요 속에서 가치를 찾는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엇갈릴 수밖에 없는 경험적 한계가 있었다. 세대차이가 자그마치 40년인 엄마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다투기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인내와 관용이 필요할 것이다.


서로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인내와 관용이 필요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서 삶은 단지 먹고사는 것이 1순위였다. 먹고살기 위해 삶의 수많은 가치들은 쉽게 포기되었다.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이 되는 일보다, 가족을 먹이고 살리는 어머니가 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집안의 기둥으로써 아버지가 되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반대로 8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 태생인 MZ세대에게 삶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선다. 자신의 적성과 선택에 따라 일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입으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먹이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이를테면 자기 계발이나 운동과 같은 취미 영역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린 시절부터 먹고살기 급급했던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살기 위해 먹는 일에서, 가치를 위해 영혼을 먹이는 일로 시선이 옮겨졌다. 이는 40년 세월의 변화가 일구어낸 시대적 발견이자 성장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2030년에 태어날 아이들은 90년 대생들과 어떻게 다를까? 엄마가 나를 보며 그랬던 것처럼 혀를 끌끌 차게 될까, 혹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세대의 성장과 발견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좋겠다. 편견과 아집이 아니라, 호기심과 지혜로 나이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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