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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서 Feb 19. 2022

내가 언제부터 우울증일까

내가 언제부터 우울증일까?


의사는 내가 만성 우울증이라던데 그 시발점이 언제부터일까.


고등학생 때? 아니면 중학생? 그게 아니면 난 엄마 뱃속에서부터 우울이라는 양수 속에서 절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약하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레퍼토리는 이제 너무 지겨워서 그냥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감성적이고 예민하구나 하고 넘길 뿐이다. 이 문제는 깊게 생각할수록 해답은 나오지 않고 더 깊어지기만 하니 이게 최선이다. 아직까지는.


요 며칠 사이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왜 아르바이트할 때 그런 날처럼. ‘오늘따라 너무 한가하네’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몰아닥치는 손님들처럼.


여기저기 면접을 불려 다녔고

왜 따는지도 모르는 컴활 시험을 봐야 했고

이혼을 하네마네 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줘야 했다.

다 커버린 그러나 아직 어린, 동생을 달래줘야 했고

진작 독립해버린 큰 언니에게는 괜찮다고 여기는 걱정하지 말라고 짐짓 괜찮은 척을 해야 했다.

취준에 지친 혹은 직장 생활에 지친 친구들의 한탄에 위로의 말을 건네야 했다.


몸이 아파왔다.

근육통에 불면증에

심장이 뛰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러니 되든 안되든 꾸역꾸역 밀고 나아갔다.


집이 멀다. 경력이 없다. 나이가 많다.

면전 앞에서 쏟아지는 질문을 가장한 무례에 생글생글 웃어야 했다.

있지도 않는 허구의 열정을 보여주기도 지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애걸복걸하는 내 모습이 비참했다.


“밤새야 하는 일이 많은데 괜찮겠어요?”

“막내니까 한 180 정도 괜찮죠?”

“지금은 7일 출근할 필요는 없는데... 막상 촬영 시작하면 그냥 다 출근하는 게 편할 거예요. 괜찮죠?”

“집이 멀어서 이거 월급 받으면 택시비로 다 나가겠네. 그래도 괜찮겠어요?”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그러나 답이 정해진 이 의미 없는 질문에 입꼬리가 경련 나게 웃으며

할 수 있다며 버틸 수 있다며 자신 있다며.  

면접에 떨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하자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격한 친구들이 나보다 잘난 게 없을 때는 그런 생각이 심해졌다.


‘비슷한 스펙인데 면접에서 떨어졌다면 내가 그렇게 별로였다는 건가’


그런데 사실 이해가 간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불안에 지금 누가 툭 치기만 해도 휘청거리다 곧장 떨어질 것 같은데. 그 사람들 눈에도 나의 불안과 망설임이 보였겠지.


솔직하자면, 그 친구가 나보다 더 그 프로에 적합했기 때문이겠지.


마지막 면접이 떨어지고 그 와중에 컴활이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지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렸다. 진통제는 삼켰으나 울음을 삼키지는 못했다. 오래간만에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몸은 죽도록 힘들었는데,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화가 났다.


다 알면서 물어보는 면접관에게는 무슨 대답을 원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다 트집 잡을 거면 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냐고.

싸우는 부모님에게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해결하라고 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동생에게는 철 좀 들으라고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일로 우냐고

독립한 언니에게는 언니가 혼자 살겠다고 나를 버려서 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을 평생 내가 지고 있다고. 부모한테 받을 건 다 받아놓고 혼자 자유롭게 사니까 행복하냐고 몰아붙이고 싶었다.

쌓여있는 설거지 빨래 같은, 안 하면 티 나고 하면 티 나지 않은 집안일. 그런 사소한 일들이 너무 버거워 쓰레기 봉지에 넣어서 다 버려버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다 버리고 싶었다.

가족도 일도 친구도 그리고 나도.


한참을 울고 나니 감정이 좀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화장대에 앉아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거울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피부는 푸석했고 여기저기 뭐가 잔뜩 올라와있었다. 거기에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습관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다가 곧 그만뒀다. 삶에 이유는 없고 그렇기에 결국에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죽을 수는 없으니까. 아직은 죽을 수 없으니까. 이런 생각은 그만둬야지.


그래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집에 굴러다니는 진정제를 먹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치우고. 커피를 타고. 컴활 시험을 접수하고. 이력서를 수정하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수면제를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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