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과 아바타가 무단결근으로 모두를 엿 먹인 채 언론사를 관뒀다. 지속은 이미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함께 점심을 먹는데 보름이 지속을 걱정하는 척 말을 꺼냈다.
"언니는 이제 결혼도 해야 되는데 인턴 월급이 너무 적어서 어떡해요?"
지속은 웃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신이 받는 월급 액수를 정확히 또박또박 말하며 면접 때 이야기가 잘돼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이윽고 보름과 아바타의 눈빛이 흔들렸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급하게 은행을 가봐야 한다며 지속을 혼자 두고 사라졌다.
지속은 알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데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는 신참내기가 자신보다 월급을 더 받으면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걸. 지속은 그런 보름과 아바타를 보며 미소를 숨길수가 없었다. 지속은 이 순간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호의를 베풀고 나이트 죽순이들과 말을 섞었다.
지속은 보름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정말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다면 같은 질문을 계속하거나 먹을 걸 혼자 쏙 빼고 주지 말고 마음속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심어줘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라고. 지속은 보름과 아바타를 말 한마디로 무찌르고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자, 이쯤이면 감이 오지 않는가. 이제 지속이가 불행해질 차례다.
두 기자가 하던 일들은 모조리 지속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눈엣가시 같던 것들이 사라지니 견딜만했다. 인턴 생활도 한 달이 남았고 곧 정규직으로 승격되니 더 살만해질 거라고 지속은 생각했다. 26살 남 기자가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고 대기자님이 건강상의 문제로 관두고 국장과 지속이 단 둘만 초점 시사에 남으며 분위기가 묘해지기 전까진.
국장은 지속보다 8살 많은 유부남에 어린 아들을 둔 애 아빠였다. 지속이 쓴 기사를 늘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지적했기에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흐르니 국장과 매일 단둘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지속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웃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 늘 실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 아까 전 소리를 버럭 내지르던 국장이 까르르 소년처럼 웃으며 지속이에게 웃긴 놈이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서로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를테면 에너지바를 하나 사서 반만 쪼개 먹고 고이 뒀다가 남은 반을 다음날 먹었다거나, 짬뽕을 시켜서 먹기 전 국물과 건더기를 락앤락 통에 옮긴 뒤 면만 호로록 먹곤, 다음 끼니에 남겨둔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하는 굳이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 없는 궁핍하고 구질구질한 일상들을 말이다. 그럼 국장은 지속의 말을 반짝이는 눈으로 들으며 정말 재밌어했다. 출산 후 부쩍 신경질이 늘어 와이프가 짜증만 낸다는 국장의 말에 지속은 그럴수록 아내를 더 챙겨야 한다고 호르몬이 널뛰기를 할 텐데 잘해주란 조언을 할 정도로 둘은 친해졌다.
하루는 회장이 지속을 불러 월세도 비싼데 자신의 원룸 건물에 반값으로 세를 줄 테니 들어와 살라는 솔깃한 제의를 했다. 다달이 나가는 50만 원이 부담스럽던 지속은 덥석 알겠다고 했는데 어디서 얘기를 들었나 국장이 지속을 불러 혼을 냈다.
"너 회장 원룸 건물 가봤어? 되게 오래되고 여자 혼자 살기 치안도 안 좋아. 그리고 이건 너만 알아.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된다..... 원룸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어."
지속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매번 화만 내고 혼내서 싫어했는데 국장이 말리는 모습이 진심 같아서 회장에게 다시 가서 계약기간을 채워야 한다며 제의를 거절했다.
지속은 태어나 처음으로 인생 선배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저씨지만 은근 대화가 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엔 국장에게 혼이 나고 점심시간엔 국장을 웃기는 그런 사이로 몇 달은 평화롭게 지냈다.
하루는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갔는데 입이 작은 지속이 입가에 양념을 묻혔다. 입에 묻었다고 말해주면 될 것을 국장이 냅킨으로 지속의 입가를 닦아줬는데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며, 지속의 얼굴이 붉어졌다. 뭔 짓이지 이게? 여동생 같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이 아저씨가 미쳤나? 지속은 국장의 행동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몹시 불쾌했다.
그 후 다이어트를 한다는 핑계로 같이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오전에도 혼나고 오후에도 혼나고 종일 국장에게 욕만 먹다가 지속의 하루가 다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사이비 기자고 남의 기사를 베껴 나르는 기레기 짓인데 왜 그렇게 혼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이 서른 인턴 지속이가 언론고시라도 패스해 진짜 기자가 될 거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완벽주의자였나? 뭐 어찌 됐든, 매일 혼나다 혼나다 질린 지속인 결국 원룸 계약 만료도 못 채우고 8개월 만에 도망치듯 초점 시사를 떠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