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살 지속은 여전히 모태 솔로였다. 그녀에게 연애 기회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속은 수능을 본 후 고등학교 동창과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데이트를 했다. 지속은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과 단 둘이 영화를 봤고 추워 보인다고 남자가 벗어 준 재킷을 입어 보았으며 돈가스를 함께 먹었다. 가족이 아닌 이성과 해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명재는 주말이면 고향으로 내려와서 지속을 만났다. 그런데 약속을 미리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지속이 싸이월드 일기장에 고향집에 가야지 쓰면 꼭 주말에 집 앞이니 만나자는 그의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속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을 그에게 느끼고 있었다. 은근슬쩍 손을 잡으려 한다거나 어깨 위를 감싸려 하는 시도는 귀여운 축에 속했고 그의 입으로 직접 좋아한다거나 사귀자는 소리도 못 듣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 만나 데이트를 하는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이메일로 첫 연락을 한 것도 지속의 절친이 명재가 널 급식실에서 처음 보고 꽤 오랜 시간을 짝사랑해왔다며 연락해보길 권해서였다. 명문대에 다니는 명재와 지방대에 붙은 지속은 본격적인 캠퍼스 생활이 시작되기 전까지 종종 만나며 데이트를 했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편한 남사친 여사친 관계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감정으로 모호한 관계를 이어갔다.
지속은 밸런타인데이에 또 데이트를 하자는 명재를 거절 못하고 만났다. 만나기 전, 날이 날인데 분명 초콜릿을 기대하고 있을 텐데 무시하고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영화만 봐도 되나 찜찜해하다가 명재를 만나기 직전 편의점에 들러 만원 안팎의 초콜릿을 사서 그에게 건넸다. 세상 행복한 얼굴로 이 초콜릿은 먹을 수 없다며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다는 명재를 보고 지속은 안 샀으면 큰일 날뻔했다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렇게 또 사귀는 사이도 친구 사이도 아닌 관계로 지내다 화이트데이가 되었다. 역시나 명재는 지속에게 대학교 첫 학기로 바쁘겠지만 만나자고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동안 여러 생각을 했던 지속은 처음으로 그의 데이트를 거절했다. 영리한 명재는 그 뒤로 연락하는 횟수가 줄었고 지속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관계는 정리가 되었다. 긴 시간이 흘러 그와 본 영화가 티브이에서 방영될 때 지속은 생각했다. 명재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냥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었나? 만약 그때 명재의 입으로 사귀자는 소리를 들었다면 지속은 그와 사귀었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지속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티브이를 꺼버렸다.
갓 스무 살 대학생이 된 지속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지속이 수업을 듣거나 공강 시간에 벤치에 앉아있을 때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정물처럼 지속 곁을 맴도는 동기가 한 명이었다. 슬금슬금 다가와 옆자리에 앉는 영호를 보며 넓고 넓은 자리를 두고 더운데 왜 굳이 여기 앉지? 하는 의문만 들었을 뿐 별생각 없던 지속이었다. 영호와 친한 동기 남자애들이 지속만 지나가면 큰소리로 영호 만한 애가 없다니까 하거나 지속과 영호가 잘 어울린다며 만나보라고 낄낄거리기 전까진....
영호는 지속에게 말을 거는 일도 데이트 신청을 하는 일도 좋아한단 고백도 없었다. 영호의 능글맞은 절친들의 입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했을 뿐.
오티 때 보고 반했대. 그때 영호가 너랑 벌칙 받았잖아. 그랬다. 그랬었다. 게임 벌칙에 걸려서 지속은 영호와 빼빼로 게임을 했다. 남자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마주했던 적인 있던가. 신입생이라 말도 못 하고 저질 게임을 하며 지속의 속은 분노로 부글거렸다. 거부할 수도 없고 지속은 빼빼로 끝을 짧게 댕강 베어 물고 고개를 돌렸다.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던 지속과 달리 그게 좋아서 자신을 좋아한다는 영호에게까지 분노가 옮겨갔다. 저질 새끼. 지속은 영호를 혐오했다. 심지어 엠티를 가서 받은 지속의 롤링페이퍼엔 온통 영호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만 냉랭하게 굴고 영호의 마음을 받아 주란 맥락의 글들이었다. 지속은 화가 나서 페이퍼를 힘껏 구겨버리며 부들거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속은 처음으로 영호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난 네가 싫다 그러니 너도 날 좋아하지 마라.
다음날 전공 시간에 본 영호는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긴 문자에 답장이 없었기에 문자가 안 갔구나 지속은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친한 유정이가 할 말이 있다며 지속을 불렀다. 유정 말에 따르면 문자를 받은 날 영호가 속상함에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울면서 지속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다며 널 진짜 좋아했나 봐 안타깝더라 말했다.
지속은 영호가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막상 문자엔 답도 안 하고 자신이 아닌 친구를 불러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는 건 무슨 노릇인지. 지속은 싫던 영호가 더 싫어졌다. 그렇게 지속은 지금까지 남자에게 직접 좋아한다 사랑한다 사귀자란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지속은 왜 자신을 좋아한다는 남자들은 입을 두고 직접 말을 못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십 대의 미성숙한 풋풋한 사랑이라 그랬다고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로 인해 상처받을 자신을 더 사랑했기에 그랬다고 그들은 지속의 마음이 열리도록 두드리지 않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래서 지속은 자신을 스쳐간 인연들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