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가 같은 과 선배 누나와 연애를 하고 영호가 다이어트로 환골탈태 후 미인대회 출신 후배와 사귀는 동안 지속은 여전히 혼자였다. 지속은 이 모든 상황을 예측이나 한 듯 초연했다.
지속은 원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문방구 유리장 속에 있었던 영심이 샤프펜슬이 그러했고 핑크색 공주 책가방도 그러했으며 병찬이도 그랬다. 10살 지속의 맘에 쏙 들었던 그녀 평생 이성을 보고 설렜던 최초이자 마지막인 사람. 지속은 훗날 어른이 됐을 때 병찬의 이름을 잊을까 두려워 책상 의자 안쪽에 그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또래와는 다른, 깊이가 있던 예의 바르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던 병찬이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고 전학을 가던 날에 지속은 생애 첫 후회를 했다.
지속은 비싼 영심이 샤프펜슬의 하위 버전 샤프를 쓰며 만족했고 날아라 슈퍼보드 속 미스터 손형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을 군말 없이 매고 다녔으며 병찬이는 잊었다. 지속은 그렇게 주어진 환경 속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런 지속이 대학을 다니며 원하는 것이 생겼으니 바로 원구였다. 원구는 노래를 잘 불러 대학 축제 때 늘 무대에 섰는데 작은 키에 훈남 미를 한 꼬집 정도 넣은 외모가 부담 없어 지속 마음에 딱 들었다. 지속은 절친한 유정에게 같은 과 동기 중에 원구가 제일 잘생겼다 말했고 유정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함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렇게 지속은 원구를 향한 마음을 키우며 주말에 한 번씩 뭘 하냐며 문자를 먼저 보내고 그의 답장을 기다렸다. 한 시간 뒤 성당을 다녀왔다는 답장을 받고 내일 수업시간에 보자는 인사를 전하며 지속은 가슴이 미세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원구를 보고 지속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자 원구는 시니컬한 말투로 지속에게 뜬금없이 문자 좀 보내지 말라고 씹을 수도 없고 성가시다고 말했다. 아까 분명 머리 위로 꽃잎들이 떨어졌는데 원구의 말에 꽃잎은 왕소금으로 바뀌어 지속의 얼굴을 따갑고 붉어지게 만들었다. 지속의 자존심은 원구의 말에 산산조각나버렸고 한 번 망가진 자존심은 뭔 짓을 해도 복구되지 않았다. 이는 지속의 연애관이 바뀐 순간으로 후에 이성관계에서도 원구의 말은 치명적인 내상을 남겼다.
원구는 지속의 절친인 유정을 짝사랑했다. 유정이 얼마 뒤 원구와 원구의 절친인 채훈에게 동시에 사귀자는 고백을 받았다며 지속에게 어쩌면 좋을지 연애상담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지속은 유정의 말에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를 후려 맞은 듯 멍했다. 유정은 키도 크고 유머러스한 채훈에게 끌리는데 둘이 친해서 껄끄럽게 됐다며 날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지속은 유정의 미소가 네가 잘생겼다던 원구는 관심 없노라고 자신은 친구의 감정까지 배려하는 사람이란 부연 설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유정과 채훈은 커플이 되었다. 지속은 원구의 요청대로 더 이상 그를 마음에 두지 않고 그 어떤 연락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멀리서 원구가 보이면 먼길로 돌아갈지언정 마주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지속은 그것이 조각난 자존심을 주워 모아 풀칠을 하는 행위라고 믿었다. 더 이상 선후배 동기 포함 대학교엔 지속이 호감을 느끼는 이성은 아무도 없었다.
원구도 대학시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속이 알기론 그랬다. 그나마 지속은 절친과 짝사랑남의 연애를 지켜보는 지옥은 없었지만 원구는 아니었다. 원구는 절친과 짝사랑녀가 만나는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그거면 지속이 당한 굴욕에 비하는 벌이라고 지속은 그렇게 자위했다.
지속은 스무 살 난자하게 쏘아 올리는 사랑의 작대기를 모두 그러모아 사다리를 만들고 싶었다. 높게 솟아오른 사다리의 꼭대기에 서서 엇갈린 청춘의 마음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마치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란 듯 무표정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