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의 안녕
어릴 적부터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나란 애는 어떤 앤가?' 하는 부분이었다.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에 따라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그날 나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심지어는 날씨에 따라
또는 식단에 따라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하고
놀랍게 우아해지기도 했으니까.
당연히 내 속마음으로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후자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으나
나는 대체로 전자였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생활을 하고
사회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존재론적인 불안은
다양한 문제와 직결됐다.
첫째, 나를 향한 험담을 견디지 못했고
둘째, 남들 눈치를 지나치게 보았고
셋째,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에 인색했고
넷째, 얼굴이 붓고 살이 쪘으며
다섯째, 애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까지도 나는 이 문제를 두고
골머리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다.
여전히 험담에 취약하며
종종 나를 혐오하다가
종국에는 애인에게 불똥을 튀겼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반복을 영원히 할지도
모를 존재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냥 알게 됐다.
이 흔들림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가장 솔직한 '창문'이라는 것을.
이 창문마저 없으면
나는 부지불식간에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인 인간이라는 걸.
가만히 두잖아? 그러면 나는,
현관문을 철퍼덕 잠그고 커튼을 내리고
몇 달 동안 혼자 웅크린 채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가
결국 시커먼 영혼이 되어버릴
겁쟁이 + 소심쟁이였다.
문제는 이번 생에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을
바꿀 재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이 앎은 나에게 어떤 생존 욕구를 상기시켰다.
너는 이 창문을 활짝 열고 소리쳐라-
너와 비슷한 이들과 목소리를 함께 나누라-
그러나 어느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내게 그런 내면의 각성이 일어났다고 해서
당장 다음 날부터 획기적인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으로 인해 상황이 급반전하여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2012년에 창업한 후로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회원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회원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었다.
통화는 잦아졌고 또 길어졌다.
나의 보스(BOSS) 이어폰은
파업을 선언한다는 듯
여러 가닥의 전선을
밖으로 삐죽삐죽하게 내보냈다.
처음 김이사님의 손에 끌려
보스(BOSS) 매장에 갔을 때
"무슨 이어폰 하나 값이 19만 원이나 해요?"
내가 펄쩍 뛰며 말했다.
콩나물 가격이 언제 이렇게 올랐냐고
펄쩍 뛰던 우리 엄마와 영락없이 닮은 얼굴로.
김이사님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좋은 이어폰은 우아한 목소리를 만들지."
나는 그 말이 두고두고 좋았다.
내 목소리가 보스(BOSS) 이어폰을 타고 흐를 때마다
왠지 조금은 우아해지는 것 같아
저절로 허리가 곧게 펴졌다.
시간대별로 타이트하게 예약을 잡아 놓고,
1시간에 1명꼴로 10명씩,
10시간을 상담한 날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그때부터도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하는
뉘앙스가 다분히 섞인
통신사 상담원의 설문조사를 받기도 했다.
회색 장마구름이 도시를 뒤덮던 7월,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한때 활기차게 웃고 떠들던 공간은 이제 적막했다.
책상들은 각자의 자리에 버려진 듯 서 있었고,
컴퓨터 모니터들은 검은 거울처럼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방태워주식회사 파산.
그 단어를 처음 입 밖에 내뱉던 날,
혀끝이 저릿했다.
법인대표자 연대보증으로 인한 파-산.
맞다. 의사결정력이 지독히 부족한 내 책임이 맞다.
변명할 염치도 없었다.
4년의 시간, 7억의 투자금,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밤의 고민들.
모든 게 증발했다.
이후 나에게 주어진 건 오직 법적 의무뿐이었다.
재산 목록을 작성하고,
온갖 정보를 성실히 공개해야 했다.
나의 모든 실수와 오판이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들.
그 과정은 마치 나체로 서 있는 듯한
치욕스러운 경험이었다.
나는 매일 밤, 기도하는 심정으로
'투명인간'이 되는 꿈을 꿨다.
글쓰기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처음에는 일기처럼 시작했다.
산책하고 글쓰고, 숨만 쉬다가 글쓰고,
자고 나서 글쓰는 하루하루가 쌓여서
「읽으며 살 빠지는 이상한 책」이 완성됐다.
열 두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편집자들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상업성이 없다는 평이 다수였다.
반신반의하며 내놓은 책은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2위에 올랐다.
그리고 또 한번,
「여자가 봐도 예쁜 여자들」을 출간했다.
이번에도 예스24 여성 자기계발 부문 2위에 올랐다.
응? 이렇게 갑자기?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니, 내가 5만명이 구독하는 유튜버라니,
진심으로 어리둥절했다.
때때로 이렇게, 운은 온 힘을 다해 온다.
[재창업 사업화 지원 협약 - 우수소상공인 선정]
안녕하십니까.
이지원 대표님께서는
최종 발표평가에 합격하셨습니다.
향후 일정 안내드립니다.
핸드폰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시 한 번 읽었다.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러니까 대략 십수 년 전에도
똑같은 문자를 받았다.
그 얘기를 하자면 엄마의 표현을 잠깐 빌려야 하는데 엄마는 종종 나를 '냉정한 년'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하동이라는 시골에서 7남매의 맏딸로 자랐다. 먹고 살기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탓에 크게 차려 놓은 한 상 앞에 우르르 모여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시간을 즐겼다.
반면 나는 태생적으로
사람들이 여럿 모인 곳에 오래 있으면 두통이 생겼다.
그때마다 내 방문을 꼭 닫고
혼자 있고 싶어 했는데
엄마 눈에는 그런 내가
정이 부족해 사람들을 가까이할 줄 모르는
'냉정한 년'이었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시 전문여성 CEO 양성 지원 사업'에
최종합격 대상자가 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당시가 어떤 시절이었냐면
스티브 잡스가 2011년 10월에 별세한 직후였고
전 세계인이 그를 애도하는 심정으로
스타트업 열풍이 불던 그런 때였다.
뜨거운 나라 대한민국이 그 행렬에 빠질 리 없었다.
신생 벤처기업 창업 및 투자 활성화가 두드러졌으나
여성 창업가들은 여전히
음식·숙박·도소매업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지식서비스 쪽으로
여성 창업가를 성장시키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처럼 지방 출신 여성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서
그때까지 서울 구경 딱 두 번 해본 내 입장에선
세상에! 서울여성이라니!!!
그 단어는 내 마음에 확하고 불을 질렀다.
그 최종합격 메일을 받고
냉수를 몇 잔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더 이상
냉정한 년이 아니라는 것을 어서 알려야 했다.
곧바로 핸드폰을 열어 '우리 엄마' 버튼을 누르고
'병원에는 사표를 쓰고 서울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매우 충동적으로
하나의 인격과 같다는 법인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앞서 고백했듯이 나는 쫄딱 망하고 만다.
그리고 십수 년이 흐른 어느 날
소상공인으로서 '우수'하다는 표식의 상을 받았을 때
어떤 안도가 몰려왔다.
실상은 소심쟁이 + 겁쟁이지만
자주 냉정한 년으로 오해받던
지독히 내성적인 내가
법인 대표로 파산하고 소상공인이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게다가 '우수'하다잖아.
'우수' 소상공인이라잖아.
나는 진심으로 어마어마하게 기뻤다.
그러니까 그 기쁨의 모양이 어떤 거냐면
밤새 깜깜하고 막막하고 두려웠던 시야로
아침 햇빛이 딱 들이밀어서 일순 환해졌는데
창문만큼만 단정한 사각형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크기에
엄청 안심되고 편안하고 행복한 기쁨이었다.
이거 이러다가, 심지어
내가 창문을 활짝 열어 볼수도 있겠다는
야심찬 기대감 같은 것도 생겼다.
분위기상점을 재창업할 때 나의 비전은 이러했다.
분위기미인 세계관을 제안하는 것.
이에 동의하는 그녀들을 만나는 것.
함께 향유하고 싶은 콘텐츠를 한 자리에 모아 영감을 주고 받는 것.
나처럼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그녀들과 연결되고 싶었다.
그녀들과 함께하면 창문 밖으로 고개를 활짝 내밀고
숨통 틔이는 발랄한 기분으로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