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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n 15. 2021

인도 첸나이, 그 첫날의 기억

"엄마! 이 나라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큰 딸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내 불안함이 들킨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딸의 그 말이 11년의 인도 생활의 버팀목이 되어 준 사실이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용기가 되었다.


2009년 5월 9일

우리 세 모녀가 처음 인도에 발을 디뎠던 날이다. 남편이 먼저 가있던 나라, 내게는 너무 생소했두려웠던 그곳에 도착한 날이다.


그 나라에 대한 나쁜 이미지라도 있었으면 오히려 두려움이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그마저도 없었다. 인도인지 인도네시아 인지도 헷갈리던 때였다. 수 십 년 전, 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문명의 발상지, 무슨 왕조, 간디, 코끼리, 그리고 카레. 그 정도가 내가 아는 그 나라에 대한 전부였다. 작은 정보라도 얻고 싶어서 서점을 찾았지만  인도에 관한 책은 잘 찾지도 못할 때였다.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었다. 어린 딸들과의 동행이어서, 그 딸들의 미래가 불안했었다. 


이질적인 문화, 낯선 환경, 그리고 섭씨 50도 가까운 너무 힘든 날씨 안에서 종일 시달리고 있을 남편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그곳 상황이 아예 가늠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돌아와서 한숨 돌린 남편의 전화만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다.


더위가 너무 힘들었던 남편은 두 딸과 아내가 걱정이 되어서 한국에서 1학기는 마치고 여름방학에나 들어오라고 했다. 더위가 한풀 꺾일 7월 즈음에 오기를 권했다. 4,5월이 가장 더운 도시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알지 못하는 나라에 남편 혼자 보내 놓은 그 마음이 편할 리가 만무했다. 안 보고 걱정하는 것보다 그 속에 들어가서 같이 부딪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중학교에 막 입학해서 과학고 진로를 생각하고 있던 큰 딸과 학교 방송반 아나운서가 되어서 학교생활이 너무 즐거웠던 6학년이 된 작은 딸, 둘 다 기특하게도 인도로 이사 가는 일에 별 거부감이 없이 잘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면 가자. 너희들만 괜찮으면.'그렇게 짐을 꾸리게 되었다.


유통기한 지난 것도 한국식품이라고 이름만 붙었으면 없어서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공산품은 비싸고 품질은 떨어진다고도 했다. 필요한 것 구하기가 너무 힘드니 이쑤시개 하나까지 챙기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사 컨테이너에 실을 공산품과 식료품들을 사고 사고 또 사며 이사 날짜까지 장만 봤었다.  불안함을 이삿짐 박스 채우는 것으로 달랬고, 그 불안함의 일부를 먼저 배에 띄웠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지방에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밤새 인천에 올라가서 아침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경유했다. 직항로가 없는 그 도시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 밤 12시가 넘어서 도착한 첸나이 공항이었다. 짐을 싸느라 무리를 해서인지 허리 통증이 있었다. 리무진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잠을 한숨도 못 자고 도착한 첸나이 공항이었다.


그렇게 내린 인도 첸나이 국제공항. 

그 첫 기억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도장이라도 찍어 놓은 듯이 선명하다.

지금처럼 번쩍번쩍한 유리 건물이 아니었다. 분명히 국제공항일 텐데 우리나라 작은 도시의 시외버스 터미널 같았다. 낡았고, 지저분했, 잡했다. 이미그레이션 통과하기, 짐 찾기 등등 모든 과정이 수월하지가 않았다. 시간도 너무 걸렸고, 처음 들은 인도 영어는 내 귀에 영어가 아니었다.


도착해서 눈으로 맞닥뜨리고 나니 더 두려워졌다. '이 나라에서 과연 살게 될까?' 바리바리 챙겨 짐가방보다도 더 무겁고 갑갑한 마음으로 공항 밖을 나왔다. 두려움 반, 기대 반이었던 마음은 도착한 공항에서 기대감은 단박에 사라지고 두려움으로 완전히 덮여버리 순간이었다.


인도 특유의 찐득한 공기 냄새와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은 후끈함, 거기에 더해진 무수히 많은 새까만 사람들. 코와 피부눈으맞은 첸나이의 그 첫 느낌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너무도 강렬했던 인도의 첫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뚜렷한 기억 하나가 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울리고, 눈이 따갑고, 코가 시큰한, 내 몸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여러 감정이 올라오는 선명한 모습이다.


공항 밖을 나왔다. 두려운 마음을 딸들에게는 안 들키려고 조심하며 무거운 카트를 밀었다. 인도 사람들이 허술한 가림막 너머에 빼곡하게 서 있는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희뿌연 조명 아래 검은 피부의 인도인들 사이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손을 흔들며 반가움의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두 달 동안 얼굴이 많이 그을렸다고 전해 들은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수백 명의 인도 사람들 틈에 상대적으로 환하게 내 눈에 들어온 내 남편이, 딸들의 아빠가 듬직하게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래, 여기에 아이들 아빠가 있었지. 가족이 다 모였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살아보지 뭐' 그렇게 되었다.


차에 올랐다. 남편이 미리 얻어 둔 '우리 집'이라는 곳까지 40여분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도시의 모습은 너무 깜깜하고 심하게 낡아 있었다. 인도 4대 도시라는 첸나이인데 건물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지막하고 허름한 집들 뿐이었다. 우리가 탄 차는 차선이 제대로 없는 도로 위를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들을 용케 피해서 잘도 달렸다. 오토바이 소리, 오토릭샤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 길을 달렸다. 손잡이를 얼마나 세게 움켜 잡았는지  팔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동네에 가까워지자 도로변엔 거의 10m마다 노숙인들이 자고 있었고, 떠돌이 개들도 그들처럼 깡마르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충격적인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의 두려운 마음을 딸들이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딸이 말했다. "엄마! 이 나라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부끄러웠다. 어린 딸보다 못한 엄마구나 싶었다.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딸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낯선 나라, 낯선 도시의 밤 한가운데를 달렸다. 이미 새벽 3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우리가 살 집에 도착을 했다. 한 달도 더 전에 보내 놓은 짐이 박스째 널브러져 있었다. 전 날에 도착했단다. 냉장고와 식탁, 침대만 겨우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틀 밤을 새운 나는 3일째 밤도 새울 수는 없어서 대충 이불을 찾아서 잠에 빠졌다. 잠이 두려움을 이긴 밤이었다.


머리맡에서 "까악 깍 " 귀가 찢어질 듯 악을 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알고 보니 안방 창 틀에 앉은 까마귀 소리였다. 그곳이 어디인지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다. 침대는 분명 한국의 내 침대인데 그곳은 더 이상 한국이 아니었다.


'맞다. 인도에 왔지? 이곳은 인도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나의 인도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박스째 쌓여있던 이삿짐 정리가 시작되었다.


3년, 길어봤자 5년을 예상했었지만, 그 예상을 깨고 11년 동안 살았던 인도 첸나이의 그 첫날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의 나의 인도, 우리 가족의 인도는

한국에서 가졌던 불안함과  공항에서 마주했던 두려움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해 주었다. 불편은 했지만 불안은 없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희망의 나라가 되어주었다. 꿈을 꾸게 했고, 그 꿈을 이루게 해 주었다. 누구보다 씩씩하고 즐겁게 그 나라를 누리고 즐겼다.


 그 11년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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