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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n 22. 2021

인도에서 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이 코미디였다.

2009년 당시의 인도는, 첸나이라는 도시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세상이었다. 길거리에는 신발 신은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고, 큰 볼일, 작은 볼일, 거리낌 없이 해결하는 모습을 차창 너머로 흔히 보던 때였다. 도로변 맨땅에 낮이고 밤이고 널브러져서 잠을 자는 노숙인 너무나 많았다. 제대로 된 쇼핑몰도 없었고, 외국인이 드나들만한 마땅한 식당이나 커피숍도 거의 없었다. 성인 여자들은 모두가 인도 전통옷만 입을 때였다.

그런 나라, 그런 도시에서 살기 시작했다. 화가 다른 그 나라에서 외국인인 나에게는 황당한 일 투성이었다.



영어가 아니었던 인도 영어


우리 세대의 영어교육이라는 것이 읽기는 해도 듣거나 말을 하지는 못하는 교육이었지 않은가? 그 영어 실력으로 더군다나 인도 영어를 처음 접했던 나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천둥소리 같은 현관 벨이 울리고 깔끔한 정장 차림에 신발도 신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며칠 전에 구입한 TV를 살피더니 한참을 그 인도 영어라는 언어로 얘기를 다.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고, "땡큐 마담"이라며 그 남자는 신고 온 반들반들 구두를 한참 동안 다시 신고 나갔다.

지금까지 나는 그 귀여웠던 인도 남자가 누군지를 모른다. 짐작만 할 뿐이다. 



인도 돈이 익숙하지 않아서 생긴


인도 돈은 루피이다. 그 당시 환율로 1루피는 28원 정도였다.

처음 생수 배달을 시킨 날이었다. 예상대로 신발을 안 신은 남자가 땀냄새를 엄청 풍기면서 어깨에 생수통을 이고는 거실을 저벅저벅 발자국을 찍으면서 주방으로 운반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배달을 끝낸 그가 생수 값을 얘기했다. 거실에 찍힌 흙 발자국에 신경이 너무 쓰여서 순간 산수를 잘못해 버렸다. 한 통에 70루피이 두통, 140루피를 건네야 하는데 인도 돈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던 나는 10루피 동전 한 개와 1루피  개를 건넸다. 돈을 받고도 안 가고 남자는 계속 서 있었다.

 '아 맞다. 인도는 팁 문화가  있는 나라라고 했지?' 얼른 1루피를 건넸다. 그래도 안 가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헌드레드 포띠 루피 마담!" '응? 140이라고?'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쏘리 쏘리" 나도 웃고 남자도 웃었다. 100루피 한 장, 50루피 한 장을 다시 건넸다. 앞서 준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는 말을 못 했다. 결국엔 팁을 25루피나 준 셈이 되었다. 10루피가 팁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일이 인도 생활 초기에는 잦았다. 인도 지폐는 모두 간디 얼굴만 그려져 있었고, 동전, 지폐 모두 구권, 신권 섞여 있어서 초창기에는 계산 한 번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책상 배달


작은 딸 책상을 샀다. 당연히 책상이 배달될 줄 알았다. 한국에서 44년을 살았던 내 상식은 그랬다. 그런데 완제품이 아닌 조립품과 함께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들이닥친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인도 남자들은 항상 들이닥친다. 한두 명이면 되는 일에 늘 대여섯 명이 들이닥친다. 책상 하나 조립하는데 그 다섯 명이서 반나절을 끙끙대더니 결국엔 명이 더 왔다. 서랍이 잘 안 닫히는 이유였다.  전문가라는 그 명도 결국엔 해결을 하지 못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안에 모기와 나뭇가루와 인도 남자들 특유의 땀냄새와 맨발 자국만 가득 남기고 끝이 났다. 끝난 게 아니라 포기였다. 안 닫히는 서랍은 내일 와서 고쳐주겠다고 했다. 기겁을 했다. "안 와도 된다. 노 프라브럼." " 프라브럼. 내일 꼭 와서 고쳐줄게." 같은 말을 서로 다섯 번씩은 주고받았던 것 같다. "알았다. 바이." 더 이상 말을 섞고 서 있는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내 집에서 제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뿐이었다.

내일 다시 오면 괜찮다고 하고 현관에서 돌려보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그런데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다행인지 닌지 꼭 오겠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말했던 그 사람들 얼굴을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처마 공사


이사 간 집에서의 일이다. 특이한 구조의 집이었다. 베란다 같기도 하고 마당 같기도 한 공간이 있었다. 건기에 이사를 해서 잘 몰랐다가 우기에 비가 쏟아지니까 열어놓은 거실 창문 안으로 빗물이 들이쳤다. 집주인에게 얘기했더니 사람들을 보내줬다. 오겠다는 날짜가 아닌, 약속을 서너 번이나 어긴 어느 날, 어두워지는 저녁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다.

 

손이 느린 인도인들, 함석인지 스틸인지 모를 처마 하나 다는데 몇 시간이 걸리더니 깜깜해서 더 이상 못하겠다며  마무리는 내일 와서 해준다 하고 가 버렸다. 일하다만 자재들을 어지럽게 그대로 놔두고서.

그런데 그 사람들, 연락도 없었고 더 이상 나타나지를 않았다. 주인에게 말했더니 이틀 뒤에 보낸다고 했다. 그러고도 나는 그들을 적이 없다. 우리가 귀국하던 4년이 지난 그날까지도. 그날까지 그 자재들은 내가 옮겨 놓은 우리 집 창고에 그대로 쌓여있었다. 공사한다고 떼어 놓았던 전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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