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l 26. 2021
인도 첸나이는 적도와 가까운 도시이다. 그래서 말도 못 하게 덥다. 최고 섭씨 50도를 육박하고 최저라 해봤자 25도 내외이다. 실내는 에어컨 냉기로 춥고, 밖은 뙤약볕에 공기가 타들어가는 그런 곳이다. 날씨 적응이 그 도시에서의 첫 번째 숙제이다. 소소한 집안일만으로도 쉬이 지치기 일쑤이다. 그래서 누구나 도우미를 고용한다. '메이드'라고 불리는 아줌마들이다.
그 도시는 4, 5월이 가장 덥다. 5월에 그 도시로 이사를 간 나는 내 집에 군식구 드나드는 게 성가셔서 10개월여를 혼자서 버티고 있었다. 결국에 면역력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열대지방의 온갖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고야 말았다. 열 몸살을 심하게 앓았고, 그제야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이었다. 우리 둘의 인연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작되었다. 화려한 색의 사리를 입은 자그맣고 예쁜 인도 아줌마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몇 마디 나눠보고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우리 집 입주 청소를 했던 아줌마였다. 늘 땀에 절은 모습만 봤기 때문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줌마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 집 일을 하고 싶다고 몇 번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사람을 쓰는 일에 부담이 되던 때여서 거절을 하곤 했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짠하고 나타나 준 아줌마, 그렇게 인연이 된 우리는 내가 인도를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이어졌다.
아줌마 이름은 '마하'이다. 인도에 살 때 내가 가장 많이 불렀던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많이 불렀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이야기이고,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야기이다.
인도의 하층민 여자들은 일찍 결혼을 한다. 만 18세 경이 결혼 연령이다. 마하에게는 중학생 우리 딸들 또래의 딸 둘이 있었지만 겨우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나와는 10살도 더 차이가 났다. 참 예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었지만 똑똑했다. 영어 단어도 제법 알고 타밀어도 쓸 줄 알았다. 눈치도 빠르고 영리했다.
2010년, 당시에는 메이드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무성할 때였다. 집안의 물건에 손을 타는 일이 잦던 때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 집의 도난사건 얘기가 들릴 때였다. 소소한 세제 가루나 소금 한 줌부터 귀금속이나 고액의 현금까지도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경찰에 신고라도 하고 싶지만 인도 경찰들이 하층민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아는 마음 약한 한국 마담들은 신고도 못하고 속앓이만 했다. 데리고 있던 아줌마가 경찰들의 대나무 막대기에 무지막지하게 맞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렸지만 메이드 때문에 내 시간을 제약받기가 싫었던 나는 첫날부터 현관 열쇠를 아줌마에게 맡겼다. 믿어보자 싶었다. 그러고 10년, 마하는 어디에도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가난한 하층민이었지만 자존심도 강하고 당당했다. 앞집의 브라만 마담에게도 할 말은 다하는 그런 아줌마였다. 예뻤고 똑똑했고 성실했고 정직했다.
함께 한 시간의 양만큼 신뢰가 쌓였고, 너무 편한 사이가 되어갔다. 마하 딸들이 우리 집에 놀러도 오고, 여동생들도 수시로 들락거렸다. 메이드를 너무 편하게 대하면 안 된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우리는 그렇게 또래의 딸을 키우는 엄마로 함께 했다. 방학 때 두어 달 한국에 머물 때도 아줌마가 있어서 비워둔 내 집이 전혀 걱정이 되지가 않았다.
마하네 집은 꽤 멀었다. 어부인 남편의 일터가 있는 항구 쪽이었는데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1시간도 더 걸리는 그런 곳이었다. 어린 딸들 하교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가려고 늘 동동거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집에 가면 또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을 마하가 늘 안쓰러웠다. 우리가 이사를 하고 나서는 2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가 되었는데도 두 집, 혹은 세 집 일을 하면서 그 먼 곳을 따라왔다.
마하는 작은 체구지만 힘도 세고 손도 빨랐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느리고 게으르다는 얘기가 우리 아줌마한테는 해당되지 않았다. 성격 급한 나와는 그런 것도 잘 맞았다. 10년 동안 같은 일을 하다 보니까 3시간 동안 할 일이 1시간 반이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 집 살림은 눈을 감고도 다 아는 경지가 되었다.
한국 아줌마나 인도 아줌마나 수다를 좋아하는 건 똑같았다. 나는 콩글리쉬, 마하는 타밀어와 몇 개의 영어단어로 우리는 대화가 가능했다. 같이 마늘을 까면서, 같이 빨래를 개면서 그 짧은 언어로 얘기도 많이 하면서 지냈다. 남편 흉도 들어주고, 딸들 자랑도 들어줬다.
인도에서의 11년, 많은 인연들이 오갔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봤던 사람은 우리 아줌마 마하이다. 30대였던 아줌마는 40대가 되었고, 40대였던 나는 50대가 되었다. 젊었던 우리는 나이가 드는 과정을 함께했다. 딸들도 함께 키웠다. 마하는 우리 딸들 옷을 빨아주고, 방청소를 해주며 '빅 베이비', '스몰 베이비'라고 부르며 예뻐했다. 나는 마하 딸들의 학비를 보탰다.
11년이나 살았던 인도, 그 인도를 떠나면서 눈물은 나지가 않았다. 원래 성격이 겉으로 많은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기도 했지만 크게 울 일도 없었다. 충분히 살았고 미련도 없었다. 장기간의 인도 배낭여행을 끝으로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나는 인도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 크게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는데 우리 아줌마 마하와의 이별의 순간이었다. 10년 세월을 함께한 아줌마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대견한 마하가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웠고,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아무 말 없이 같이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우리 아줌마 마하와 이별을 했다.
요즘도 문득문득 마하 생각이 난다.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씩씩하게 잘 살고 있겠거니 믿게 된다. 마하의 인생이 덜 고달프기를 기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