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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Aug 02. 2021

우리 아줌마 마하에게 못다한 말

인도를 떠나던 날, 내가 마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고작 그것이었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온다. "너무 장하다, 대단하다, 존경한다" 그 말을 왜 해주지 못했을까?


11년을 살았던 나라, 10년을 같이 했던 아줌마. 그 긴 세월의 마지막이 너무 아쉬워서 속이 상했다. 후련하게 올랐던 귀국 비행기가 한낱 메이드 때문에 망칠일인가 싶어서 화가 났다. 그 순간은 '한낱'이 컸다.


한국에 자리를 잡고, 정신이 좀 들고 나니까 가끔 생각나던 인도. 그 생각의 한구석은 항상 아줌마 차지였다. 공항 가던 길, 전화기 너머의 그 목소리가 자꾸 생각이 났고, 내가 섭섭하다며 쏘아붙였던 말들이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가슴이 갑갑해졌다.



마하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2010년 그 당시에 14살, 15살이던 우리 딸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엄마는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지만 두 딸 대학 공부는 꼭 시키겠다고 자주 말하던 엄마였다. 가끔 엄마를 따라서 우리 집에 놀러 왔던 딸들은 자그마하니 귀엽고 똑똑해 보였었다. 하층민의 사는 환경이야 뻔할 텐데 그 환경에서도 마냥 전방지축으로 키우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상냥하면서도 얌전했던 기억이 있다.


직업은 어부였지만, 배를 타는 날보다 술 마시고 노는 날이 더 많다고 들었던 마하의 남편은 전형적인 인도 하층민의 남자였다. 화풀이를 가족에게 하면서 폭력도 휘두르던 그런 남자였다.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우락부락 거친 인상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작고 오히려 착하게 생겼었다. 술주정뱅이, 가정폭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약자에게만 강한 그렇고 그런 지질한 남자였다. 지리멸렬한 이혼 과정을 오랜 시간 거쳤지만 딸들 때문에 포기하고 눌러앉은 마하였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나는 여자, 마하의 삶이 너무 불쌍했다. 렇게 내 몸 안 아끼며 사는데 나아지기는커녕 되려 자꾸만 수렁으로 빠지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복작복작 창문 유리도 없는 땀에 절은 만원 버스를 갈아타고 한 시간씩 걸려서 남의 집 메이드 일을 하러 다녔던 마하는 그래도 늘 씩씩했다. 무단결근 한 번을 안 했다. 우기 때 폭우가 내리면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비에 홀딱 젖어서는 바들바들 떨면서 현관을 들어서곤 했다. 결근을 하면 하루치 일당이 깎이는 것이 아까워서 그랬던 것 같다. 야박하게 그러지 않았는데도 두 집 일을 하던 마하는 다른 집에는 와야 되니 오는 김에 우리 집에도 온다고 했다.


2010년, 첸나이 우리 동네의 메이드의 하루 3시간 페이가 한 달에 1900루피였다. 당시 환율로 3만 5천 원 정도였다. 7만 원 남짓 번 돈으로 딸들 공부도 시키고 입에 풀칠도 하고 그렇게 살았었다.

딸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세 집 일을 해야만 했다. 영어로 공부하는 학교를 보내고 싶어서 무리를 한 듯 보였다. 만 루피 이상은 벌었지만 학비는 늘 빠듯했다.


내가 학비는 보탰지만 삶은 나아지는 게 없었고, 나이가 들어가는 아줌마는 체력도 성격도 예전 같지가 않게 변했다. 피버(바이러스성 열 몸살을 그들은 통칭해서 그렇게 불렀다)가 잦았고, 우악스러워졌다. 힘들고 거친 삶이 아줌마를 그렇게 만들었다. 처음의 상냥하고 야리야리한 모습은 사라졌고 힘세고 퉁명한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큰딸이 결혼을 했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경리 일을 하던 딸은 몇 번의 선을 봤지만 한동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했다.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무리한 다우리(인도 여자들의 결혼 지참금) 요구로 틀어지기도 했다. 몇 년을 그렇게 큰딸 신랑감 구하는 데 애를 쓰더니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윗감을 얻었다며 자랑을 했다. 공무원에 작은 집도 있는 남자라 했다. 딸을 많이 좋아한다 했다.


하루는 같이 퍼질고 앉아서 마늘을 까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딸 결혼 얘기를 했다. 결혼비용이 6 렉(약 1000만 원)이나 든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한 달에 20만 원 남짓 벌어서 두 딸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무슨 돈이 있냐니까 딸과 엄마가 모은 돈이 1 렉, 여동생이 3 렉을 빌려줬고, 2 렉은 대출을 받았단다. 딸 결혼시키다가 빚더미에 앉겠다 싶었다. 여동생은 집까지 팔아서 돈을 빌려줬단다.


결혼 준비로, 돈 문제로 피곤하고 지쳐 보이던 아줌마는 그래도 행복해 보였다. 딸이 집도 있고 직업도 괜찮은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에어컨도 사서 보내야 하고, 오토바이도 사야 하고, 안사돈 비단 사리도 사고, 현찰도 보내야 했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나는 학교도 못 가봤지만 영어도 잘하는 딸이 번듯한 남자를 만나서 엄마는 행복해했다.


그 무렵에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을 마하에게서 발견을 했다. 행복하니까 표정도 밝아졌고, 예뻐졌다. 웃으면 예쁜 그 얼굴을 자주 보게 되었다.


엄마였다. 마하는 엄마였다. 딸의 엄마였다. 딸이 행복해서 나도 행복한, 마하는 그런 엄마였다.


결혼한 큰 딸이 임신을 했고, 곧 출산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귀국을 했다.


간호대학 다니던 무척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작은딸이 있었다. 해외 취업만 하면 언니 결혼 때문에 진 빚을 금방 갚을 수 있다고 하더니 들리는 얘기로는 해외취업 보증금이 너무 비싸서 포기를 했단다. 월급이 얼마 안 되는 인도 병원에 취업을 했단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또 마음 한구석이 갑갑하고 불편해졌다.


마하에게 연락을 해봤다.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던 아줌마는 그새 또 번호가 바뀐 모양이었다. 코로나가 극심한 인도에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연락할 길이 없었다. 생활력 강한 아줌마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겠거니 생각만 할 뿐이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던 자동차 안, 기사 죤슨이 전화기를 바꿔줬다. 마하였다. 그 달 월급을 주고 가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했다. "계산이 이미 끝났는데, 가불 한 돈이 월급의 몇 배가 되는데, 딸 결혼 때 얼마나 신경을 써 줬는데 너는 마지막 날에 꼭 돈 얘기를 해야겠니?" 죤슨을 사이에 두고 영어, 타밀어 통역을 하면서 서로 섭섭한 얘기가 오고 갔다.

 

11년의 인도를 떠나면서 겉으로는 시원하고 개운하다 했지만, 무의식 속의 나는 굉장히 복잡하고 불안했었나 보다. 마하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내 감정을 거기에다가 모두 쏟아냈나 보다. 그만큼 편하고 의지했던 마하였나 보다. 자매에게 하듯이 그런 감정이 쏟아졌다.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죤슨에게 잘 설명하라고 당부는 했지만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그렇게 한국에 왔다. 인도 코로나의 무서운 얘기가 많이 들렸다. 기사 죤슨이나 라주의 안부는 SNS로 알 수가 있었지만 더 열악한 환경의 마하 얘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후회가 된다.


"마하야, 넌 대단한 사람이야. 너무 장해, 같은 엄마로서 존경해!" 이 말을 언젠가는 꼭 해주고 싶다. 그런 날이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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