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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Jul 15. 2024

들판 가득 '개망초'의 슬픈 운명

요즘 산책로를 걷다 보면 하얀 꽃들이 개천을 따라 가득 피어있다. 가운데 동그란 노른자를 하얀 흰자가 둘러친 것 같아서 마치 작은 메추리 알을 들판 가득 깨뜨려놓은 듯하다.


가득 모여있어서 예쁘고, 계란 모양이 귀엽기까지 한, '계란꽃'이라고도 불리는 그 꽃의 이름은 '개망초'이다.


작은 정원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보니, 그 정원의 화초를 가꾸다 보니, 내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꽃들과 나무들에도 눈이 가고 마음이 다.

내 아이를 가져보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눈이 안 가다가 내 아이를 낳고 나서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한다.


개천변에, 빈 공터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어김없이 하얀 개망초가 가득 덮여있어서 개망초가 없었다면 개천변은 초록 잡초들로, 빈 공터에는 휑한 흙밭으로 채워졌을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아서 '남의 아이' 개망초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동네 공터에 가득 피어있는 개망초



개천변을 걸을 때마다, 공터 앞을 지날 때마다 저렇게 예쁘고 생명력 강한 꽃이름이 왜 '개망초'인지, 여느 야생화와 다르게 정원에서는 안 길러지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정원에서 키울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름 앞에 '개'가 붙은 것인지, 데이지꽃을 닮았지만 덜 예뻐서 가짜의 의미로 '개'가 붙은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개망초'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해 보았고, 그래서 알게 된 그 이름의 유래가 너무 안타까웠다.

'개망초', 이름에서 느껴지는 대로 분명히 토종 꽃일 줄 알았다가 아니어서 내심 놀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작 즈음에 일본에서 수입한 철도 침목에 씨앗이 붙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외래종이어서, 나라가 망할 때 돋아난 풀이어서 '망국초亡國草' '망초亡草'라 불리었고, 기존의 비슷한 식물인 '망초'보다 질이 거나 모양이 달라서 '개'가 붙은, 그래서 꽃이름이 '개망초'인 이유였다.


처음부터 슬픈 운명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서식하기 시작한 꽃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원예용으로 북아메리카에서 들여와서 꽃집에서 팔리던 꽃이었고, 이름도 '핑크 플리베인(pink fleabune)'이었다고 하는데 점차 새로운 품종에 밀려나서 더 이상 원예용이 아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랬다. 어쩐지 가득 모여서 하얗게 피어있는 개망초가 너무 청초하니 화사하고 예뻐서 한낱 공터에서 자랄 태생이 아니었을 것 같더라니..


비록 시기를 잘못 만나서, 하필이면 그 시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망초'라고만 불려도 억울할 판에 '망초'만도 못한 '개망초'라 이름이 지어졌으니 얼마나 억울할 일인가 말이지.


요즘은 멀쩡한 한국이름을 두고도 굳이 영어이름을 붙여서 소위 '좀 더 있어 보이게'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는데, 상가 간판은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많다 싶을 정도인데, 핑크 플리베인(pink fleabune)이라는 예쁜 이름을 두고 타국에 자의도 아니게 끌려와서는 '개망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받으며 가꿔지는 원예용도 아닌 들판에 아무렇게나 척박하게 자라야 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개망초'의 태생과 그 이름의 유래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집 테라스에서 보이는 개천변 개망초


우리 집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면 개천변 산책로에 하얀 개망초가 말 그대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테라스에 나가서 물소리 들으며 하얗게 눈처럼 내려앉은 개망초를 바라보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알고 보니 슬픈 운명의 이름이 붙은 '개망초'를 좀 더 따뜻하고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6~7월 두 달 동안 핀다는 데 얼마 남지 않은 날 동안 노란 동그라미를 품은 하얀 꽃 가장자리에 연한 핑크빛이 도는 '핑크 플리베인'을 많이 봐 둬야겠다. 2년생 화초라고 하는데 내년에는 피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내 정원에서 정성껏 가꾸어지는 내 아이는 비록 아니지만, 왠지 눈길이 가던 그 아이는 우리 집 테라스에서 날마다 예쁘다며 감탄하며 보는 남의 아이, 나라도 잃고, 집도 잃고, 이름도 잃은 아이였다.


'한 양반집 정원에 피는 꽃'이라고 홀대를 받았던, 그저 흔하디 흔한 야생화였던 '개망초'가 태생은 북아메리카의 원예용 화초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무리 지어 들판에 펴있는 그 아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함께 모여서 서로를 의지하며 자신들은 '개망초'가 아니라 '핑크 플리베인'이라며 타국에서 꼿꼿이 도도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산책길에는 내 정원에 막 피고 있는 하얀 수국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으로 '개망초'가 아닌 '핑크 플리베인'을 바라보며 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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