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집중하며 신경 써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머리도 식힐 겸, 동네 산책을 다녀와서 리모컨을 들고 이리저리 TV 채널을 훑다가 혼자 사는 연예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곳에 멈췄다.
신경 쓰느라 굳은 머리를 풀기에는 자연 속 산책도 좋았고, 가벼운 TV 보기도 괜찮았다.
별생각 없이 보던 프로그램의 어느 지점에서갑자기 내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누가 보면 큰일이 난 것처럼 펑펑 울고 있었다.대낮에 혼자 TV 앞에서 뭔 청승이었는지 모르겠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억하며 눈물짓는 출연자와 그 옆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엉엉 우는 MC를 보면서 나는 순간 내 아버지와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스물여섯이던 해에 돌아가신 아버지, 마흔한 살이던 해에 돌아가신 엄마가 그 순간 보고 싶어서 울다가,친할머니, 할아버지 정도 많이 모르고, 외할머니, 할아버지 정도 모르고 자란내 딸들이 안타까워서 또 그게 그렇게 눈물이 났다.TV 속 연예인들의 눈물이 이해는 되지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온전히 알 수는 없어서 더 슬펐던 것 같다.
딸들은 서른이 가까워졌고, 나는 예순이 가까워졌다. 엄마의 역할은 미미해졌고, 그 사실이 후련하기도 하지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이제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리라 다짐을 하며, 심심해진 시간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며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낮에 혼자서 보던 TV 프로그램은 나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내 인생의 새로운 역할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엄마의 자리에 할머니의 역할,그것도 외할머니의 역할이들어올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비록 딸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만 얻을 수 있는 역할이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만, 두 딸 중에 적어도 한 명은 그 역할을 나에게 가져다줄 것이라 믿으며,심심해지기 시작한 내 인생에이미 마음은 바빠졌다.
부모와는 또 다른 사랑을 베푸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늦둥이로 태어난 나도 모르고, 안타깝게도내 딸들도 잘은 모른다. 외할아버지는 본 적이 없고,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손녀들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친할머니는 손녀들이 인도에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할머니'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그 역할을, 나도 알지 못하고, 딸들도 잘은 모르는 그 사랑을 그다음 세대를 위해서 감히 감당해 보리라는 꿈이 생겼다.
나도, 내 딸들도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사랑을 미래의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날 누군가에게는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
딸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하고, 내가 그때도 건강해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내 인생에 귀한 역할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