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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an 09. 2021

비닐봉지와 거스름돈 2000원

야간에 줌 화상 모임이 있어 이발을 하러 간다. 현관을 나서자자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춥다. 바람이 투명한 칼처럼 살이 접히는 부위마다 엷은 상처를 낸다. 우리 아파트 근처에도 미용실이 꽤 있지만, 나는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헤어메이드를 찾는다. 헤어메이드는 건물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 있는 위치에 간판도 크지 않아서 장사가 될까 싶지만, 예약 손님만 받을 정도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매장 크기는 커 봐야 여덟 평 남짓. 종업원 없이 원장님 한 분이 운영을 하는데 연배는 대략 사십 대 중반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보통 이발을 할 때는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택시 안에서 기사가 끊임없이 말을 붙이는 원리와 비슷하게. 그런데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 갑작스러운 대화가 불안하다. 그럼에도 헤어메이드는 별 부담감 없이 푸근하다. 긴장을 풀고 느긋한 심정으로 머물 수 있는 느낌은 거의 헤어메이드 원장님의 재능이라 봐도 좋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원장님 표정이 어두웠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한 낌새마저 있었는데, 역시나.


"죄송한데 물이 얼어서 샴푸 못 해드릴 것 같아요. 그래도 자르시겠어요?"


샵에 들르기 직전 집에서 머리를 감았기 때문에 샴푸가 급하지 않았고, 자른 머리카락 일부가 얼굴에 묻는다 해도 다른 곳에 들를 계획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집에만 있을 건데요. 뭐."


나는 얌전히 앉아 머리카락이 사각사각 잘려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눈이 멀어가는 극사실주의 화가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아무도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TV 음량이 적지 않았음에도 몹시 적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금껏 헤어메이드에는 항상 대기 손님이 있었다. 손님의 수다를 배경음 삼아 듣는 버릇이 배어서 그런지 썰렁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왠지 적막감을 조금이라도 몰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오늘은 가게가 한산합니다."

"요새 손님들 텀을 길게 띄워 받고 있어요. 동해가 난리잖아요. 손님 다 못 받더라도 내가 신경 쓰여서 안 되겠더라고."


그리고 또다시 침묵. 원장님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나름 단골로서 뭔가 위로를 건네고 싶을 지경이었다. 방역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의 피해는 자영업자들이 가장 많이 부담한다. 적어도 교사인 나는 월급이 끊기지 않는다. 괜한 잘난 척이 될까 함부로 어설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젠장, 왜 이렇게 날씨는 추워가지고 미용실 수도관을 얼게 만드는 거야. 올해 북극 한파는 지구온난화로 북극 권역과 북반구의 기온 차이가 줄어들어 발생했다. 기온 차가 많이 나면 제트 기류가 형성되어 바람의 장벽처럼 북극의 냉기가 내려오는 걸 막아준다. 그 천연 방패가 사라졌다. 탄소를 마구 사용하면, 북극의 빙하가 녹고, 여름 가을의 태풍이 닥치고, 겨울에는 한파가 들이치고, 헤어메이드의 샴푸 서비스가 중지된다. 우리는 지구에 사는 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촘촘한 연결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현금으로 미용 대금을 지불했다. 원장님은 천 원짜리 두 개를 내어주시며 샴푸 값이라고 하셨다. 나는 뜻밖의 거스름돈이 차가운 북극의 바람 같아서 "아이고, 고생하시는데 됐습니다. 머리 감사합니다." 하고 뛰쳐나와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집으로 가는 길에 출출해서 스캘럽스에 들러 마늘 바게트와 치아바타를 집어 들었다. 사장님이 비닐봉지에 빵을 담아주시려는 걸 집이 코 앞이라며 거절하고 양손에 빵만 덜렁 들다. 비닐, 편리함, 값싼 포장, 코로나19, 배달. 으으으, 나의 평범한 일상은 이미 자원을 대량으로 소모하고 지구의 균형을 망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나는 치아바타 속살에 숨은 올리브를 조용히 씹으며 좀 더 불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싫어할지라도 이건 머리로 밀어붙일 사안이라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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