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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an 07. 2021

레모나 패딩 점퍼

둘째의 패딩 점퍼를 세탁했다. 결과는 대실망. 헹굼 코스를 2회나 더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딩점퍼에 낀 거뭇한 때와 얼룩은 거의 지워지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막 세탁기에서 꺼내서 축축한 것이 아니라 웅덩이에 옷이 빠져서 축축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다. 후우, 우리는 어쩌자고 형광빛이 도는 노란색 패딩 점퍼를 딸내미 겨울옷으로 고른 것일까. 문제의 레모나 패딩점퍼 - 동생은 조카의 패딩 점퍼를 이렇게 부른다 - 구입은 2019년 11월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가족은 시즌 오프 세일 제품을 모아 파는 온라인 샵에서 옷을 주로 구입한다. 가령 어린이 옷은 보리보리, 성인 옷은 하프클럽, lf몰 같은 곳에서 찾는 것이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이다. 생산 연도가 1년만 지나도 의류의 가격은 50% 이상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선호하는 스타일이 명확한 편이고, 크게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질이 좋은 제품을 찾는다. 사이즈도 일반적인 생산 범위 내에 속해 있다 보니 시즌 오프 제품이라 해도 우리 취향과 몸에 맞는 옷을 찾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둘째는 환경적인 측면이다. 최근 우리 가족은 육식을 가급적 피하고, 빵과 채소류를 비닐 대신 집에서 준비해 간 별도의 저장용기에 담아오는 등 기후변화 대응 생활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건을 고쳐서 오래 쓰고, 폐기되는 물자의 양을 줄이고자 여러 모로 궁리하는데 시즌 오프 제품도 그 일환이다. 쇼윈도에 전시되는 신상보다는 일선에서 물러난 폐기 대기품 중 알짜를 고른다. 유통기한이 이틀 남은 우유를 집어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버려지는 것보다는 백 번 낫지 않은가. 지출도 줄이고, 쓰레기도 줄이고. 아마 형광 노란색 패딩도 일석이조의 기쁨으로 충만해서 결제를 했을 것이다.


와아, 역시 예뻐!


거의 70% 다운된 가격에 배송된 팬콧 키즈 패딩은 마감이 훌륭했다. 도대체 이렇게 괜찮은 물건이 왜 땡처리가 되는 거야? 하면서 짝짜꿍을 했던 것 같다. 눈부시게 곱고 샛노란 옷에게 남은 미래는 더럽혀지는 길 뿐이라는 불안감을 감추면서 말이다. 두 살 터울 자매에게 레모나를 입혀 나가면 감광지가 주위의 빛을 흡수하듯 관심을 받았고, 특히 아기 엄마와 어르신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후후 무려 70% 세일 제품으로 이룩한 패션이라고요, 하면서 뿌듯해했지만 70%까지 세일이 된 배경도 문제의 찬란한 그 빛깔 때문이라는 점을 애써 무의식 아래로 밀어 넣었다. 혹시 레모나 패딩을 향한 주변인들의 지대한 주목의 이면에는 이러한 궁금증이 깔려있지 않았을까.


하나, 저 집 부모들은 세탁이 취미 아닐까? 저런 옷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세탁 기술과 멘탈이 받쳐주는 거겠지. 아무튼 놀라운 의류 선택이군.

둘, 저 집 부모들은 참으로 무신경한 사람들이겠군. 저런 옷은 곧 누렇게 변하고 말건대, 그걸 심드렁하게 바라보려면 어지간히 무신경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셋, 애들이 사방팔방 놀이터 바닥을 쓸면서 노는데 지켜보고만 있군. 용감한 걸까, 무모한 걸까. 저들의 태평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대책이 없다는 쪽에 가까운 것 같아.


젖은 패딩을 한숨 쉬며 건조대에 널고 있자니, 디스카운트 수준을 40-50% 대로 낮추더라도 역시 어두운 색이 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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