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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an 06. 2021

삼척군 맨홀 뚜껑

드림디포에 볼 일이 있어 삼척 중앙시장 인근을 지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삼척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이곳은 여러 번의 보수와 증축을 거쳐 현재도 활발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근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오프라인 레코드 매장과 만화방이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 불을 밝힌 모습에 나는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더불어 인근 건물에는 최신식 코인 노래방과 NO Brand 매장이 입점해 있어 변화무궁한 시가지의 시각적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흐음, 역시 시내 구경은 언제 와도 색다른 재미가 있군 하면서 성큼 발걸음을 옮기는데 인도 중간에 딱 멈춰 서고 말았다.

 

'삼척군'


인도에 깔린 수많은 맨홀 뚜껑 중 닳고 닳은 한 뚜껑이 내 발목을 잡았다. 삼척군이라, 그렇다면 이 뚜껑은 적어도 1995년 1월 삼척시 행정 개편 이전에 설치되었다는 의미다. 양각으로 새겨진 글씨는 사람들의 발에 무수히 밟혀 약간 뭉개지고, 각 획의 높이가 제각각이 되어버렸지만 발을 디뎠을 때 견고한 느낌이 확실했다. 교체의 필요성을 조금도 감각할 수 없는 상태. 그곳에는 맨홀 뚜껑이라는 사물의 특징이 그러하듯 생김새는 투박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단순함의 미덕이 현재 진행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30여 년 가까이 현역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맨홀 뚜껑 위에 있는 것이 송구스러워 얼른 뚜껑에서 내려왔다. 인근 맨홀 뚜껑들을 대 여섯 개 살펴보았다. 모두 삼척시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삼척군 뚜껑은 베테랑이었던 것이다.

 

중앙시장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삼척군 표시 맨홀 뚜껑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내가 오늘 지나친 500미터 반경에 한해서는, 유일한 제품이었다. 불현듯 삼척군 뚜껑에 깊은 호감을 느꼈다. 나는 한꺼번에 모든 면면이 새것으로 바뀌는 것보다, 과거의 영광이 묻어있는 사물들이 곳곳에 섞여 있는 풍경을 좋아한다. 오래되었다고 모두가 구닥다리는 아니며, 세월이 지나도 존경받고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보통 겸손하고 말수가 적어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알아 봐주고 귀하게 대하여 주는 누군가가 없으면 미래라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기 일쑤다. 보통 추억은 기억 속에 머물기도 하지만, 어떤 대상이나 장소를 통해 유추하는 경향도 있으므로 의미 있는 무엇을 잘 보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나는 삼척군 맨홀 뚜껑이 제자리를 꿋꿋이 잘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제자리를 지키는 한 나는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다정한 눈길로 쓰다듬고 예의 바르게 옆으로 비켜서서 갈 것이다. 힘내세요. 삼척군!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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