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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01. 2021

그럼에도 종이책

나는 노트 필기를 못 하는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 뭘 적긴 적어야 하는데 도무지 교과서 맥락을 따라가면서 별도의 공책에 글자를 적는다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교과서 본문 옆 빈칸에다가 선생님의 강조 사항이나 떠오르는 생각 따위를 적었다. 책은 항상 더러웠다. 내 친구는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책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책 괴롭히기를 멈출 수 없었다. 눈만으로는 도저히 독서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절과 어절 사이에 사선 긋기, 밑줄 치기 등 손과 눈동자가 같이 움직여야 어찌어찌 문장이 머리에 들어왔다. 


학창시절이야 대충 부모님 손을 빌려 버텼는데, 대학에 가면서 문제가 터졌다. 책을 더럽게 – 내 기준에서는 사랑스럽게 – 보려면 책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학생 신분에 책값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교수님들이 수업 교재로 사라고 강요하는 두껍고 비싼 책이 그렇게 짜증 날 수 없었다. 정작 강의 때는 별로 사용하지도 않고 내용도 구린 교재를 사야 한다니, 심지어 복사도 못하게 하니 열불이 났다. 한정된 대학생 용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책은 제한되어 있다. 학점 때문에 교재를 우선적으로 사고 나면 수중에 남은 돈은 한 줌에 불과했다.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 갔다. 책은 많았지만 내 책은 없었다. 내게 독서는 길들이기 혹은 관계 맺기와 비슷한 의식이다. 내 책이 되려면 어떠한 제약 없이 글자를 연필 가는 대로 흘려 넣고, 문장 아래 굵은 선을 새겨야 하는데 그걸 못 하니 손이 벌벌 떨렸다. 나중에 취직하면 책 실컷 사서 거칠게 봐야지, 그게 당시 나의 입버릇이었다. 


인고의 세월, 그래도 어떤 책은 직접 손에 쥐고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드시 촉감으로 물성을 느끼며 흡수해야만 하는 책. 나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노르웨이의 숲’ 같은 작품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지겹지 않고, 새로운 깊이가 있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언제 무슨 식당에서 어떤 메뉴를 주문할지 알고 있었지만, 텍스트를 알고 모르고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 책은 제값을 주고 사서 소장했다. 그냥 책장에 꽂힌 채 책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손을 뻗으면 다시금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 있었다. 


나의 이런 성향은 교내 문학 동아리 가입으로 이어졌다. 거기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의 단골 데이트 장소는 서점이었으며, 두 딸과 함께하는 지금도 여전히 서점에 간다. 나에게 서점은 대체 불가능한 공간이다. 서점에는 당장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책들이 수 만권이나 있다. 평생을 다 바쳐도 읽지 못할 책들이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중에서 한 권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가슴 떨린다. 책방지기가 카페지기를 겸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커피 냄새는 책 냄새와 비견될 수 있는 향기다.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방금 결제한 책을 읽는 주말 오후는 95% 이상의 확률로 행복하다. 


책을 사서 보는 사람에게도 단점은 있다. 항상 책꽂이가 비좁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로 책을 사는 부류의 사람이기에, 우리집 서가는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다. 책을 칸 맞춰 꼭 끼우고도 공간이 부족해서 그 위에 가로로 쌓아두기 일쑤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책 비우기를 실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또 만만치 않다. 


우선, 어떤 책을 비울 것인지 선정해야 한다. 내가 좋아서 고르고 골라 산 책의 우열을 나누고 서가에서 빼내는 일은 곤혹스럽다. 한우처럼 A급, B급, C급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면 작업이 수월할지도 모르나, 책은 극히 주관적인 매체이다. 혹자는 그래도 객관적으로 괜찮은 책임을 보증해주는 지표들이 있지 않냐고 말하기도 한다. 가령 뉴욕타임즈 몇 주 연속 1위, 00상 수상, 00추천 도서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나는 숱하게 그런 지표들에 속아 왔고, 남들이 재미있다는 책도 내게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흥미나 재미를 느끼는 건 사적이고도 내밀한 내부 작용에 의한 것이기에, 나에게는 객관적 지표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 과거에 별로였던 책이 나이 먹고 좋아지는 경우도 허다해서 책 버리는 건 참 어렵다(버린 책을 또 사기도 한다). 


금전적 애로사항도 있다. 우리 부부는 월급을 모두 생활비 계좌에 넣고, 각자 용돈을 타 쓴다. 한 달에 책값과 책방 커피값으로 평균 7만원 이상을 소요하니(그것도 한 사람 당)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읽은 책을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앞서 밝혔듯이 나는 책을 무진장 험하게 – 내 기준에서는 어디까지나 친밀하게 – 보는 사람이라 판매도 불가하다. 가까운 사람 중에 불편함을 감수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에게 책을 분양하거나 버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종이류를 수거하는 할아버지가 한 분 있는데, 나를 무척 좋아하신다. 내가 책을 들고 가면 표정이 확 바뀐다. 서로 통성명한 적도 없건만, 우리는 손발이 잘 맞다. 노끈으로 묶은 책다발은 바닥에 내려놓으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무겁다. 그 소리가 지갑에 돈 채워지는 소리로 들리는 할아버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시며 얼른 책 묶음을 낚아채 가신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줄 아는 내 친구 A는 전자책을 권했다. A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애서가이다. 대학 시절, 그의 자취방에는 내 키보다 높은 책장이 놓여 있고, 나는 베개 대신 A의 책 서너 권을 베고 낮잠을 자곤 했다. 그런 그가 최근 애써 모은 도서 컬렉션 절반 가량을 중고 거래로 처분하고 전자책 뷰어를 샀다. A는 내 앞에서 직접 기계를 시연해 보였다. 


“여기에 32기가까지 저장할 수 있어. 전자잉크라서 눈도 안 아프고.”


전자책의 세계에서 책은 권 단위로 측정되지 않았다. 32기가면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물으니, 작은 서점 하나가 들어가 있다고 답했다. 최근에 나온 단말기라 만화책도 선명하게 보였다. 또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이어폰을 연결하면 기계가 책을 읽어주는 기능까지 있다 하니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종합선물세트나 다름없었다. 나는 손으로 화면을 쓸어 책장을 넘겨 보았다. 전자 잉크가 깜빡거리며 다음 장의 내용을 재구성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놀라운 잉크는 책과 나 사이를 중재해주는 집사 같은 존재였다. 집사는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알아서 적당한 크기로 글자를 배열하고, 삽화도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그려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반응속도가 아주 빠른 편은 아니지만, 답답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운 독서 생활을 알리는 태양이 저 멀리서 떠올랐다. 그러나 전기의 세계에서 뻗어온 낯선 빛은 내게 닿는 순간, 짙은 얼룩으로 변하며 사라졌다. 


전자책은 내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근원적인 한계를 품고 있었다. 가상의 공간에서 나는 결코 텍스트에 나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내 손이 하는 일이라고는 전자책 뷰어가 바닥에 떨어져 화면에 금을 남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기기를 붙들고 있는 게 전부다. 가끔 다음 장으로 넘기는 버튼을 누르거나. 내 독서 행위의 대주주는 눈과 손으로서, 나란히 지분을 반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넘어가 버리면 손을 조기은퇴 시키는 꼴이 된다. 도의 차원에서도, 편의 차원에서도 불합리한 결정이다.


나는 전자책 뷰어를 A에게 돌려주고, 우리 동네 ‘서호 책방’으로 향했다. 늘 마시는 모카포트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책상에 앉았다. 여기는 덩치가 큰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책상 높이가 다른 곳보다 높다. 거의 가슴팍까지 온다. 이 사소한 차이는 내 허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목과 시선 처리를 한결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 머그잔을 내려놓다가 커피가 살짝 넘쳤다. <마담 보바리> 436쪽 왼쪽 귀퉁이가 갈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연필이 종이를 괴롭히는 짓거리에 비하면 커피 자국은 젠틀한 축에 속한다. 으음, 책은 역시 이렇게 읽어야 제맛이다. 뷰어 배터리 걱정이나, 액정 필름을 씌울지 말지 따위를 고민하지 않는 독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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