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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01. 2021

유관순과 아이스크림

2020년 12월

조용하던 동네가 코로나로 어수선하다. 인근의 학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여러 학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학생, 교직원 확진자가 나와 2주간 모든 등교 활동이 멈췄다. 이제 학생들은 가정 내 컴퓨터 앞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 온라인 수업을 위해 교사는 가상의 공간에 교실을 만들고, 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행여 자신이 바이러스 전파의 연결고리가 될까 하여 행동을 삼간다. 아이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내일이기에, 충분히 보호받으며 행복하게 자라날 권리가 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상황을 보면 대한민국은 위기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국가 축에 속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백 년 전의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했다. 


1910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주권을 잃었다. 식민지 조선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군 지휘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겼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비유하자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는 노예에 가깝다. 유관순은 국권피탈의 굴욕을 떨치고자 만 16세의 나이로 만세 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만 16세, 유관순이라는 이름과 연결짓지 않고 나이만 본다면 그야말로 호시절이다. 나는 16세를 떠올리면 교복과 풋풋한 얼굴이 그려진다. 집밥 먹으며 학교 다니고, 용돈 받아가며 사는 철부지. 첫 연애를 경험하기에도 나쁘지 않고, 친구들과 수다 떨며 한가로운 시절을 보내도 좋을 시기다. 그러나 유관순은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수능 날 아침이면 수험생이 지각할까 봐 경찰관이 직접 교문까지 순찰차로 데려주는 대한민국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치안은 일제의 헌병 경찰이 담당했다. 헌병 경찰은 총과 칼로 조선인을 억압하고, 무시로 살인을 저질렀다. 십대 호시절을 누리기에는 나라가 너무 흉흉했다. 유관순은 계몽운동가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며, 서울로 유학하여 학업을 수행할 만큼 배운 사람이다. 당시의 여성 진학률을 고려하면 상당한 엘리트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읽고 비판적으로 해석할 만한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나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십 대 중후반에 들어선 유관순의 눈에도 세상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동양 평화를 이루고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해 한일병합을 추진했다는 일제의 위선과 오만이 얼마나 가당찮았을까. 특정 성격이 특정 시대를 만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강력한 사건을 일으킨다. 유관순은 그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년, 연합군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다. 이에 조선에서도 우리가 대동단결하여 독립을 요구한다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튼다. 이러한 기대는 3‧1운동이라는 역사적 변곡점을 만드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지만, 유관순 가족에게는 비극의 배경이 된다. 민족애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유관순 가족 같은 사람들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시점이 오면 기꺼이 제 생명을 바친다. 감히 일반인의 정신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중책을 스스로 떠안으며 기꺼이 저항의 선봉에 선다. 평범한 사람은 본인의 안위와 위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편이 제 생명을 지키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관순은 생과 사를 초월하여 만세 운동에 투신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고민이 깊어진다.


까닭이 있다. 나는 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 누구도 생명을 담보로 타인에게 어떤 목적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연 누가 10대 소녀에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3‧1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이화학당을 나서려는 유관순과 동지들 앞을 교장 프라이 선생님이 가로막는다.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


프라이 교장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성숙한 스승이라면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무리 유관순이 자신의 의지로 항거에 참여하겠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은 꽃다운 나이 아닌가. 세상의 무거운 짐은 어른에게 맡기고 졸업을 하기 전까지 잠시 물러나 있어도 되는. 나라를 지키지 못해 미안한 건 어른들의 몫이어야 했다. 그러나 유관순은 범인(凡人)이 아니기에,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담을 넘는다. 대(조국의 독립)를 위해 소(자신의 생명)를 희생하는 게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 결심은 대단해서 부모님을 눈앞에서 잃는 참상을 겪고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운동의 기치를 이어간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우리 민족의 의지와 혼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한국인을 단결시키는 존재다. 


나의 고민은 여기서 혼돈으로 나아간다. 누구에게나 생명은 소중하다. 유관순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동포들이 엄청난 폭력 아래서 죽어가는 지옥도를 차마 지켜볼 수 없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걸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유관순은 본인이 살고자 하는 방식대로 인생을 살았다. 사람들을 감화시켰으며, 역사의 줄기를 바꾸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나는 유관순의 용기와 헌신을 존중한다. 그런데 과연 내 자식들에게 유관순의 삶을 따르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나라를 사랑하라는 말은 쉽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지침 형태로 들어가게 되면 망설여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 망설임에는 부채감이 섞여 있다. 유관순이 있었기에, 제2, 제3의 유관순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수많은 유관순의 희생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백 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산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흐음, 후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역사적 영웅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건 나의 오래된 난제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유관순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은 확실히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유관순이 1915년 봄 이화학당 편입 이후,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교장인 프라이 선생님의 비호 아래 선진 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먼저 입학해 생활하고 있던 사촌 언니 유예도의 도움으로 교우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행복한 소녀 유관순. 나는 그녀가 활짝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마트에 가면 엄마와 장을 보러 온 십 대 여학생을 종종 본다. 그녀는 대형 아이스크림 통을 들었다가 도로 냉장고에 넣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작은 콘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든다. 아마도 체중 관리를 염려하는 것 같다. 만일 유관순이 지금 우리 곁에 있었다면, 나라 걱정 대신 아이스크림 크기 결정을 두고 망설이지 않았을까.


유관순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라며 기도했다고 한다. 부디 하늘에서는 그런 심각한 결심일랑 잠시 접고, 마음껏 아이스크림을 즐기기를. 요즘 열여섯 유관순을 생각하면 자꾸 그런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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