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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Nov 18. 2021

좋은 정치도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의궤, 일상에 스미다> 공모전 3위

지독한 슬픔은 언젠가 희미해지고, 터질듯한 흥분도 가라앉기 마련이다. 인간의 감정이 무릇 그렇다. 뚜렷한 감정은 어떠한 행동을 하게끔 만들고, 이 행동이 오랜 시간 쌓이면 개인의 인생 이야기가 된다. 나는 세계가 결국 이야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야기는 전형적이나, 어떤 이야기는 전형의 틀을 뛰어넘어 커다란 감동을 준다. 내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전형의 틀을 뛰어넘은 것이다.


‘의궤, 8일간의 축제’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벌인 잔치와 수원 행차 기록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다. 생생한 재현을 위해 3D 기술, 드론 촬영, 4k급 화질 구현의 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 현대에도 부모님의 환갑, 칠순 잔치를 영상으로 남기는 사례가 종종 있지만, 혜경궁 홍씨의 생일 기록은 특별하다. 혜경궁의 아들이자 축제의 기획자가 바로 정조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어머니의 잔치를 수도인 한양에서 치르지 않는다. 축제의 장은 수원 화성. 당시에는 며칠이 소요되는 먼 길이다. 노모와 대규모 수행단을 거느렸기에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정조는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임금의 행차는 행행(行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축제는 단순한 회갑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8일간의 축제에 담긴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카메라는 정조의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비춘다. 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정조 ‘이산’이라는 인물의 철학과 기질 그리고 군왕으로서의 그릇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사를 살펴야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어야 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한다. 임오화변은 정조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즉위 후 신하들에게 던진 첫 마디가 “나는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하니 그 의미심장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도세자 제거에 성공한 권신들은 ‘죄인지자 불위군왕(역적의 자식은 왕이 될 수 없다)’를 내세워 정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다. 정치적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조가 세자이던 시절부터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가 하면, 군주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방식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자연스레 젊은 정조는 복수의 칼날을 품는다. 폭군이 될 만한 서사적 배경을 충분히 갖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정조는 세종 이후 최고의 개혁 군주로 거듭난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실패한 군주의 길을 걷지 않은 것이다. 


나는 학창 시절 화성 건설, 탕평책 계승 등 정조의 업적을 배우며 숙연해지곤 했다. 역경을 극복하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임금.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 태평성대를 이룩한 세종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조의 위대한 업적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고 파편화되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마치 국보급 금관의 세부 장식을 들여다보며 감탄할 뿐, 전체적인 형상이나 분위기는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아쉬움은 ‘의궤, 8일간의 축제’를 시청하는 가운데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다큐멘터리는 물속에 잠긴 젊은 혜경궁의 몸짓으로 시작한다. 서럽게 춤을 추는 듯, 한을 푸는 듯, 한 송이 꽃봉오리와도 같은 자태다. 이윽고 커다란 나무 궤짝이 풍덩 물에 빠진다. 어린 정조가 아비의 죽음을 목도한 바로 그 뒤주다. 정조의 악몽 속에서 뒤주는 수시로 등장한다. 눈물 흘리는 어머니와 자신의 목을 노리는 칼날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하지만 현실은 악몽보다 더 지독한 법. 즉위 첫해, 정조는 일곱 번이나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


그에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얇았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되지 않는 일생을 알차게 보내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정조의 정치 행보는 분주하다. 즉위 다음 날 규장각 설치를 명하고, 다음 해에는 서얼 차별을 철폐한다. 이 조치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같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할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왕에게 힘을 실어줄 지지 세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정조를 본 사람이라면 이 시기의 정조가 낯설 수 있다. 정치 기반은 약하고,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이 수시로 임금의 빈틈을 노린다. 식은땀을 흘리며 놀란 듯 일어나는 정조를 보고 있으면 어딘가 측은한 감정마저 든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미약한 시기의 정조가 아닌 전성기의 정조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어머니의 회갑연 행차를 이끄는 1795년의 정조는 당당하다. 황금갑옷을 착용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권좌에 오른지 19년, 그의 나이 마흔넷이다. 초라하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는 수원으로 옮겨져 현륭원이라는 번듯한 묘소가 되었고, 조선 최정예 부대인 장용영이 임금을 수호한다. 굳건한 왕권을 실감케 한다. 1785년에 장용위로 시작한 장용영은 점점 그 수를 불리더니 1795년에 이르러서는 인원이 만 이천 명에 이른다. 대규모 사병을 거느린 신하들도 감히 임금의 전면에 나서 무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 시기의 정조는 막강한 힘이 있다. 어린 시절 아비의 목숨을 앗아가고, 젊은 날의 자신을 해하려 한 신하 세력을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조는 숙청하지 않는다. 정조의 설명은 명확하다. 역모를 구실로 삼아 반대파를 죽이면 일시적인 통쾌함은 있다. 반면, 통쾌함의 정치는 반드시 후유증을 낳기 마련이라 세월이 지나면 보복이 이어지는 등 악순환이 생겨난다. 정조는 끔찍한 피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이를 그칠지(止)라고 표현했다. 임금은 신하에게 관용을 베푼다. 서슬 퍼런 칼날 대신 술잔이 돈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는 자는 돌아갈 수 없다. 사발에 가득 따른 술이 정조의 스타일이었다. 


예전에 수원 화성을 방문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성벽을 따라 걷고, 서장대에도 올랐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기억보다 정교했다. 초고화질로 재현된 현대식 영상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여 모니터에 바싹 다가앉게 될 정도였다. 나는 정조와 혜경궁이 행차하는 장면을 바로 옆 언덕에서 굽어보듯 감상할 수 있었다. 마치 왕이 오신다는 소식에 들뜬 백성이 되어 행렬에 바싹 다가선 기분이었다. 볼거리가 희귀했던 시절, 왕의 행차는 평생에 다시 없을 장관이었을 것이다. 


재현된 영상은 평범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에 가깝다. 왕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몇 명인지, 어떤 무기를 들었는지, 옷의 색깔까지도 훤히 보인다. 임금이 계신 곳에는 최고 군 통수권자를 의미하는 둑이 서 있고, 황룡기가 펄럭인다. 병사들의 표정도 제각각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황금부를 받쳐 든 사내, 대규모 행진에 흥분이 되었는지 턱에 힘을 잔뜩 준 장수, 드문드문 뚱한 얼굴을 한 이도 있다. 가마를 멘 이들은 보고만 있어도 어깨가 아프다. 


이것은 나의 상상력이 빚어낸 환상이 아니다. 기록에 근거한다. 다큐멘터리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기초 자료로 삼아 제작되었다. 의궤는 국가 공식기록을 의미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풀이하자면 을묘년(1795년)의 원행(임금이 현륭원에 행차)을 정리소에서 기록하고 제작한 의궤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과 글의 세밀함은 당대의 타 문화권에 비추어 보더라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혜경궁 홍씨의 가마 제작에 사용된 재료와 크기는 물론, 장인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제작비용이 남겨져 있다. 책장을 넘겨보면 축하 공연에 참여한 무희의 표정과 손동작이 살아 움직일 듯 박제되어 있다. 기계식 프린터로 인쇄한 것 같은 삽화는 도공이 일일이 손으로 그려냈다. 그 덕에 200년이 지난 지금도 음식에서부터, 옷, 악기, 깃발 등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림을 대량으로 복제하기 위해 목판화로 파내어 사본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글자는 금속 활자로 판을 짜 인쇄하였다. 다큐멘터리 내러이터의 설명을 듣다 보면 <원행을묘정리의궤>가 <화성성역의궤>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납득 할 수 있다. 이해와 납득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나는 납득이 되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 행차 5년 후 죽는다. 모진 세월 속에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는 어둠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 왕실의 재산으로 흉년을 맞은 백성을 구제했고, 축제도 혼자 즐기지 않았다. 지역 노인들을 초대해 같은 음식을 먹으며 장수를 기원하고, 백성이 임금의 행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혹 백성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까 하여 격쟁(징이나 꽹과리 등을 쳐서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을 들었다.


임금의 자리는 무겁고 어렵다. 항시 눈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며, 모든 언동은 공식기록으로 남는다. 엄청난 압박감. 그러나 정조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시대의 요청에 충실했다. 국가의 자본이 들어간 사업이나 행사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도록 정교한 기록으로 남겼다.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는 그 기록의 연장선에 있다. 나는 좋은 정치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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