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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an 07. 2022

공무원의 경직된 세계

강원도교육청 블로그 '쌤통'

자영업자의 자녀로 성장한 배경 때문인지, 때때로 공무원 사회의 완고함과 경직성에 흠칫 놀라곤 한다. 발령받은 지 십수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학교는 학기 말에 몹시 분주하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학생생활기록부를 작성하고, 검토, 수정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담임이 1차 자료를 작성하면, 오류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교차 검증을 한다. 작성한 사람이 한 번, 동학년 교사끼리 번갈아 가며 한 번, 연구부장이 한 번, 교감이 한 번. 대략 이런 루트로 서너 바퀴가 돈다. 학생에게 중요한 기록이기에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이다. 반면,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기록해야 할 내용의 방대함은 둘째치고, 작은 글씨로 인쇄된 종이를 수십 장씩 몇 번에 걸쳐 읽는 행위는 결코 쉽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다 보면, 금세 눈동자가 시뻘게지고 목이 뻐근하다. 아, 이래서 선배 선생님들이 방학이면 병원을 그렇게 다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검증의 어려움을 덜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용지 사이즈를 키우기로 했다. A4 사이즈의 원고를 B4로 확대해 인쇄하는 것이다. 폰트 크기도 커지고 눈이 한결 편하다. 동학년 선생님들과 교류할 때도 이 방법을 알려드렸더니 좋아라 하시며 서로 크게 인쇄한 종합일람표를 나누었다. 문제는 2차 검증을 위해 교무실로 자료를 건넬 무렵에 발생했다. 나는 이번에도 B4 사이즈를 선택했다. 하지만 취합 과정에서 ‘노!’ 대답이 돌아왔다. 메신저로 B4 사이즈 인쇄라는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A4로 다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누구는 A4로 제출하고 누구는 B4로 제출하면 통일성이 없다나. 보기에 좀 그렇다나. 솔직히 내 의견으로는 A3가 섞여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엄격한 양식이 존재하는 법정 문서처럼 장기간 보관해야 하는 경우도 아니고, 단지 띄어쓰기나 오탈자 유무를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다시 A4로 인쇄를 하면 기존의 B4 자료를 세단기에 넣어 개인정보를 파괴하고, 종이와 토너를 낭비해야 한다(내가 귀찮아서 그런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닌 건 아니지만 어쨌든). 흠, 이것이 뻣뻣한 공무원 사회의 폐단이란 말인가.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어느덧 교직경력 13년차다. 이런 사소한 일로 바빠 죽겠는 학기 말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거나,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다. 온갖 생각의 흐름과 감정 변화는 1.5초만 허용하고, “네” 하고 돌아섰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토를 달지 말아야 한다. 토를 달면 아주 높은 확률로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일을 못하는 건 괜찮아도, 조직과 기성 일 처리 체제에 균열을 가하는 일체의 행위는 안 괜찮다. 너무 튀지도, 너무 쳐지지도 않게 무난한 방식으로 성실히 지내는 게 일신의 마음 평정에 좋다. 


따지고 보면 B4도 내 취향일 뿐이므로,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누군가는 A4가 편하실 수도 있고, 인쇄 용지의 통일에서 오는 안정감이 내가 느끼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클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그런 융통성 없음이 달갑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에서 다분히 공무원적이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소박한 가정이 있고, 가정을 지키려면 답답한 공직 사회의 기풍을 감내해야 한다. 어찌 보면 쓰잘데기 없는 고집으로 조직 내 평판이 깎이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효율적인 동작으로 B4 자료를 폐기하고 A4 용지에 똑같은 내용을 인쇄하여 제출했다. 속으로는 살짝 짜증이 났을지언정, 겉으로는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기에 평화롭게 지나갔다. 


갑자기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푹푹 찌듯 더운 날이었고, 온라인 수업기간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에, 반바지를 입고 갔다. 전위적인 스타일의 진 숏팬츠는 곤란하므로 남성복 매장에서 세미 쿨 캐주얼 라인으로 분류되는 아주 얌전한 회색 반바지를 선택했다. 재질도 면이나 데님이 아니라 속건성 기능이 있는 여름 양복 섬유였다. 교실에 올라가는 길목에서 교장 선생님을 만났다. 평소처럼 인사를 드렸고, 받아 주셨다. 그리고 그날 점심 무렵 ‘공무원의 복장 양식’에 관한 규정을 메시지로 받았다. ‘민원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단정하고 창의적인 복장을 준수하시오.’ 전체 교직원에게 뿌려진 메시지였다. 아무래도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으려 하신 교장 선생님의 배려 같았지만, 나는 갑작스런 복장 규정의 환기가 내 반바지때문 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단정하고 창의적인 복장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혹시 고지식하다는 세간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보험용으로 ‘창의적인’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건 아닐까. 


화장실에 가서 내 복식을 다시 확인하였다. 카키색 폴로 셔츠에 세미 캐주얼 회색 반바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단출하다. 어느 순간부터 자극적인 디자인과 색을 피하게 되었다. 어느 것을 입어도 출근 가능할 법한 옷만 집에 쌓인다. 초음속 무기가 대기권을 날아다니고, 허블 우주 망원경이 차세대 웹 우주 망원경에게 밀리는 세계가 도래했건만 아직까지 학교에서 반바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온라인 기간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불합리성에 대해 교장선생님께 찾아가 과격한 얼굴로 항의를 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진행하고, 다음 날부터 온순한(?) 긴바지를 입고 다녔다. 나에게는 정신의 안녕과 조직 내 평화와 통일성, 귀찮음이 있으니까.


흐음, 이대로 가다가는 내 옷장은 표준 스타일의 무채색 왕국이 되어 버릴 지경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최대 선택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가장 보통의 인간상을 지향하게 될 것만 같다.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교육과정이 개편될 때마다 언급되는데, 정작 내 삶은 한 살씩 더 나이 먹을 때마다 다양성을 상실해 간다. 이래서 담임 노릇이 점점 힘든지 모른다. 아이들은 늘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데, 선생은 그렇지 못하다.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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