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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27. 2022

글이 안 나올 때 열어보는 주머니

10

원칙대로만 살아진다면 인생은 얼마나 간단할까. 그러나 살다 보면 술병으로 속 쓰린 아침도 있고, 방바닥에서 일 밀리미터도 움직이기 싫은 저녁도 있다. 폰 게임도 피곤할 지경이다. 이런 날 글을 써야 한다니 손끝에 전기가 찌릿찌릿 흐른다.


행복하자고 쓰는 글인데 나를 괴롭혀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잖아? 쿨하게 하루 쉰다. 만사가 태평하다. 또 하루를 쉰다. 머리에 고여있던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이렇게 좋은 걸, 포기하면 편하다니까. 이틀간 키보드를 밀쳐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을 보낸다. 오랜만에 글 좀 써볼까 하고 모니터 앞에 앉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과거에 글쓰기라는 고차원적인 두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프로 축구 선수도 한 달 놀면 그라운드에 바로 서지 못 한다. 사람은 적응과 관성의 동물이라 몸의 상태는 며칠 사이에도 금방 바뀐다. 지겹고 몸이 뒤틀려도 연습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파블로 카잘스는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하루 6시간씩 첼로를 켰다. 엄격한 연습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카잘스가 답했다. "나는 지금도 매일 발전해 가고 있는 것 같소". 나는 여기에 모든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진지하게 용돈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장기 레이스에 대비하자.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정신 에너지와 체력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차근차근 글을 써야 한다. 박카스를 세 병씩 들이키고, 커피를 두 잔씩 비우며 오버하는 사례를 들어서 반박하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일시적 분발은 삼일 치 자원을 당겨 쓰는 것에 불과하다.


조금씩이라도 문장을 짜 맞추며 글 쓰는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세 가지 비상 대처법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글이 안 나오는 날에 사용하는 나만의 특급 비책이다. 특급 비책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에게 최적화된 방법이므로 본인 특성에 맞게 변형하여 시도해 보길 바란다.


첫 번째 방법은 시공간 변화다. 어떤 작가는 글 잘 쓰는 비법으로 특정 시간대를 설정해 두고 같은 장소에서 글을 쓰라고 한다. 단어 하나를 입력하는 한이 있어도 진득이 자리를 지키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시킨 대로 해 보았지만 짜증만 났다. 나는 생활 리듬을 타는 편이라 컨디션이 마이너스 상태에서는 일의 효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렇다고 하루를 거르면 글쓰기 일정이 꼬이므로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나는 보통 집에서 밤에 글을 쓴다. 나만의 의식도 있다. 엄숙하게 헤드폰을 머리에 끼고 음악 볼륨을 높인다. 눈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나와 주변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뮤즈가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 상태다. 이 느낌을 유지하며 의식과 무의식에서 글감을 꺼낸 뒤 가지런하게 나열하는 것이 나의 글쓰기 루틴이다.


그런데 음악 앨범 하나가 다 끝나도록 뮤즈가 강림하지 않는 밤이 있다. 나는 컨디션 체크를 하고, 영 아니다 싶으면 컴퓨터를 끈다. 팔 굽혀 펴기 두 세트를 한다(그러면 젖산이 분비되어 잠이 잘 온다). 알람을 맞춘 후 푹 잔다. 그리고선 아침에 벌떡 일어나 눈곱만 떼고 노트북 챙겨 새벽 영업 카페에 간다. 제일 구석자리에 입구를 등지고 앉아 헤드폰을 착용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글이 살살살 뽑아진다. 뜨거운 모닝커피로 생산하는 글은 실패한 적이 없다.


모닝 카페 작전을 쓰면 아침 먹기 전까지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데드 라인이 있어서 똥줄이 엄청 탄다. 이른바 마감 효과다. 마감 이펙트는 강력한 자극제이므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분은 꼭 사용해보시길 바란다.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운동, 시험 준비, 청소 등 여러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 단, 주의할 점이 있으니 아침에 못 일어나면 끝이다.


두 번째 방법은 랜덤에 몸 맡기기다.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천재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 같은 범재는 반드시 유가 있어야만 유를 만들 수 있다. 몸에 들어오는 자극과 정보가 풍부해야 뭐라도 반응이 나온다. 고든 램지도 물만 가지고는 수프를 끓일 수 없는 법 아닌가.


글이 신통치 않고, 창조력이 바닥을 친다는 감각이 들면 나는 냄비를 떠올린다. 나의 냄비는 지금 텅 비어 있다. 평소에 이 냄비는 재료를 넣으면 자동으로 글이라는 요리를 만들어냈다. 현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의 냄비는 요리를 할 수 없는 상태다. 마력이 일시적으로 상실된 것이다. 이럴 때는 새로운 재료를 닥치는 대로 넣어서 냄비가 넘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종종 랜덤으로 여태껏 하지 않은 짓을 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기분으로 산다. 가령 오늘 나는 글이 안 나와서 오전에 하스스톤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한심한 기분이 들어서 양치를 했다. 칫솔질을 하다가 거울을 보았다. 머리가 덥수룩했다. 눈썹도 단정치 않았다. 이발 주기가 돌아온 것이다.


'마침 잘 됐다. 한 번도 못 가본 헤어숍을 이용하자.'


아파트 상가를 지나다가 본 헤어숍이 생각났다. 간판이 심플했다. 옆 가게와는 달리 금속 가위 조형물과 상호가 미니멀하게 달려있었다. 내부는 화이트풍에 조명이 환했다. 첫인상이 좋다. 고민 없이 헤어숍 문을 열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이 가위를 들고 있었다. 몸은 다부진데 고객 응대가 싹싹하고 동작이 날랬다.


"저희 샵 처음이시죠?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투 블록 해 주세요."


미용사는 빗으로 내 머리 여기저기를 빗고, 들추어 보더니 잠깐 고민에 빠졌다.


"저기 손님(하고 잠깐 예의 바른 배려의 표정을 짓는다), 이마가 넓으신(조심스레) 편이시잖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투 블록 말고 앞머리 라인을 맞춰서 길러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하면서 본인도 살짝 M자 라인업이라 밝힌다. 예민한 주제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붙임성 있게 동지애를 보이며 나를 위해주는 듯한 말투에 경계심이 풀어졌다. 똥고집을 피워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거의 없으므로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이참에 스타일을 변경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반곱슬이시니까 드라이할 때 양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해주세요. 그럼 머리가 안 꼬여요. 타고난 가르마 방향은 오른쪽이에요. 그런데 너무 오른쪽으로 손질하시면 스타일이 안 사니까, 기본 방향성은 아래로 하신 뒤 살짝만 터치해주세요."


두피 쿨 마사지 차례가 왔다. 기계로 하는 마사지는 처음이라 새로웠다. 두피가 손뼉 치며 탭 댄스라도 출 것 같았다. 원장님은 가늘어지는 모발에 효과가 있다며 샴푸 샘플을 세 개 챙겨주었다. 커트라인이 바뀌어서 그런지 인상이 한결 차분해 보였다. 살롱 드 크X쎄 선생님은 머리만 잘라주는 것이 아니라, 드라이 방법이나 모발 관리법을 성의껏 가르쳐 주었다. 2만 원을 내고 괜찮은 수업 하나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자른 후 글을 가볍게 완성할 수 있었다. 랜덤 선택이라는 매직이 통한 것이다.


글이 막히면 전혀 계획에 없었던 돌발 행동을 하고 무작위성에 몸을 맡겨보자. 비행기 타고 멀리 여행 갈 것도 없다. 줄이 길어서 지나쳤던 맛집에 들어가 흥미로워 보이는 메뉴를 고르자. 처음 듣는 차트의 음악을 셔플로 돌리고, 안 다니던 길로 가 보자. 마을이 달라 보이고, 사람들이 새로이 보인다. 하루에 다섯 가지 변칙 행동만 해도 쓸 거리가 톡톡 떨어진다.


마지막 방법은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나는 직업이 교사이기도 하지만 시험 운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별로 긴장을 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나는 항상 시험을 편안하게 치러 내는 상상을 하면서 공부했다. 매우 구체적으로 시험장의 정경과 책상, 의자를 떠올렸다. 그럼 이상하게도 시험장에서 낯선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나는 기초 이론서를 여러 번 읽는 것보다 모의고사 형태로 된 문제집을 좋아했다. 진짜로 시험을 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의고사를 한 번씩 칠 때마다 재수생, 삼수생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아홉 번 모의고사를 풀면 구수생이 되는 셈이다. 구수생이면 긴장이 덜 되니 처음 시험을 치르는 사람에 비해 느긋하게 대처할 수 있다. 내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어, 이런 느낌이랄까.


수능에서부터, 임용고사, 운전면허, 토익에 이르기까지 나는 반복적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중요한 고비마다 상상의 힘을 불어넣었다. 이론적 근거는 없어도, 뛰어난 효과를 거듭 체험하고 있었기에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용어도 몰랐다. 나중에 심리학 책을 읽다가 내가 해온 방식이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 스포츠 선수가 멘탈 관리를 받을 때 흔하게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적혀있었다.


첫 책 <선생님의 보글보글>을 쓰면서도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얼떨결에 출간 제안을 받긴 하였지만, 굉장히 막막한 상태였다. 기존의 원고를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뜯어고쳐야 했다. 목차도, 제목도, 그 어느 것도 정리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상상했다. "이미 내 책은 완성되어 있다." 하고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몇 번 반복하자 마음이 고요해졌다.


대성공을 거둘 거라는 욕심은 없었다. 어차피 현재 나의 레벨에 따라 결과가 나올 뿐이라고 생각했다. 허둥지둥 대지 않고 내 레벨에 맞는 문장을 차곡차곡 쓰면 된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책을 썼다.


<선생님의 보글보글>은 운이 따라서 몇몇 언론 매체에 소개되었으며, 2021년 청소년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2022년에는 큰 글씨 버전으로도 나왔다. 북 토크를 세 번 했고, 다른 특강 자리에 한 번 나갈 수 있었다. 직장 생활 핑계로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꽤 멋진 성과였다.


이미지 트레이닝의 위력은 정말 막강하다. 한 번 뇌가 믿어버리면 몸이 따라서 움직인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공모전 원고를 쓰다 말고 수상 소감을 입으로 중얼거리기도 한다(결과 발표도 안 났으면서!).


지금껏 10편의 글에다 용돈 글쓰기를 하기 위한 모든 노하우와 경험을 털어놓았다. 나는 실수도 잦고, 실패도 수두룩하게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즐거이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대출 이자를 벌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는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제 비행기 티켓과 커피값은 모두 글에서 나온다.


비행기 옆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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