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고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수 Feb 07. 2023

교대 합격했다는 제자를 축하하며 그리고 마음 어두워지며

강원도 교육청 블로그 '나눗쌤' 2월

추억 속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이 있다. 기억 속에서 흑백 사진처럼 저장된 풍경이 총천연색 컬러를 입고 현재로 소환되는 것이다. 내게는 아침에 받은 카톡이 그랬다.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미등록 사용자 표시를 보자마자 '흥, 댓바람부터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스팸 문자와 메일을 싫어해서 일일이 수신 차단 후 문구 차단까지 하는 성격이다. 기계적으로 삭제를 하려던 찰나 메시지 말미에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직업병처럼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는 작게 뜬 프로필을 유심히 바라봤다. 이십 대 여성으로 보였다. 전혀 모르는 얼굴. 채팅방에 접속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Y예요. 기억하시나요."


머릿속에서 앨범이 촤르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의 저 깊숙한 서랍 속에서 Y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생머리를 길게 기른 4학년의 Y를. Y는 반에 한 명쯤 있는 책 좋아하고, 글 잘 쓰는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내가 Y를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 달리기를 무척 잘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장거리 달리기.


열한 살 여자 아이에게 문무겸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지나친 처사일 수는 있으나, 나는 기본적으로 상반되는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성인 작가 중에는 달리기, 산책, 수영 등 유산소 운동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꽤 많다.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두뇌 회전과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중학년 단계에서 '문학소녀' 부류에 속하는 아이가 고강도 운동과 독서를 병행하는 케이스는 드물다. 그런 Y가 9년 만에 예고도 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가워서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Y는 응답이 빨랐고, 무척 활달해 보였다. 살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던 Y는 이렇게나 말수가 많고, 발랄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채팅하고 있는 사람은 웃음이 많은 십 대 여학생 아니, 스무 살 청년이었다.


Y는 ㅇㅇ교대에 붙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다 주었다. 나는 아직도 4학년 Y의 모습이 익숙한데 성인이 되어 대학에 붙었다니 구 년의 간극이 어색하면서도 한없이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Y는 예전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다. 4학년 진로 시간에 Y가 적어낸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희망 직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났다. 분명 Y라면 좋은 선생님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환경에 관심이 많다는 Y에게 주전자형 무전력 정수기를 선물하였다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주자 Y는 몹시 기뻐해 주었다. 나야말로 Y에게 고마웠다. Y를 거쳐간 수많은 선생님들 중에 나를 잊지 않고 연락해 주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교대 입학을 앞둔 Y는 벌써부터 임용 이후 교단에 설 날을 그리면서 다소 들떠 보였다. 이제는 나를 비롯해 동년배 선생님들에게서는 좀처럼 뿜어져 나오지 않는 열정이 그 들뜸에 담겨있었다.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제자가 긴 시간 품고 있던 꿈에 한층 다가섰으니 나도 같이 스무 살이 된 심정으로 무한한 축복을 해주어야 했으나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채팅창에서는 축하와 격려가 계속 오갔지만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는 아픈듯한 감각이 올라왔다.


'Y처럼 영특하고 야무진 친구가 인생을 걸 만큼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멋진가.'


후유, 나는 깊은 한숨이 나왔다. 결코 가벼운 심정으로라도 무조건 추천할 수가 없었다. 잘 쳐줘야 "적성에 맞다면, 교직이 천직이라면, 아이들이 정말로 좋다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조건과 변수가 운 좋게 들어맞아야 싱글벙글 웃으며 학교로 출근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교육 현장 현실이 아닐까.


나는 2023년 3월 16일이면 발령받은 지 만으로 14년이 된다. 교대에서 아내를 만나 아이 둘을 낳았고 생활인으로서 열심히 살아간다. 선생님으로서의 삶은 나쁘지 않다. 나는 교실에서 학생과 책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즐긴다. 학교에 걸을만한 작은 숲이나 텃밭이 있으면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반 아이들과 초록색을 확인하러 다닌다. 적성을 굳이 따지자면 비교적 교직에 맞는 축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으쌰으쌰 매일 힘이 나느냐, 내일이 내년이 십 년 뒤가 기대되느냐고 묻는다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십오 년이 안 되는 짧은 경력이지만 갈수록 교실 생활이 힘들다. 정서행동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어째서 출생률은 떨어지는데 금쪽이 빈도는 높아지는지. 자라며 한 번도 제지를 받아본 적이 없는 듯한 날 것 그대로의 욕구와 충동이 수시로 폭탄처럼 반을 장악한다. 금쪽이 학부모님 응대는 더욱 곤혹스럽다. 아이를 함께 잘 키워보자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가 몹시 심한 말을 들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도 여러 번 받았다. 그 후로는 전화기를 들었다가도 그냥 다시 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교사로서 재량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지는 느낌이 든다.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아이가 온 교실을 헤집고 다니며 난장판을 만들어 놔도 내가 실질적으로 아이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적다. 차분한 대화는 언감생심이며, 일상적인 교육도 훈육도 불가능하다. 모둠 활동에 엄청난 방해를 주는 아이를 진정시키려 잠깐 교실 뒤로 보내는 것도 자칫하면 아동학대가 된다.


침착한 대화가 되지 않는, 주의 산만한 아이에게 "지금 상담 중이잖아" 하고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나는 민원을 감수해야 한다. 피해를 보는 나머지 학생들을 보호하고 싶지만, 매번 극단적인 몇몇 케이스에 의해 균형과 질서는 쉽게 무너진다. 어느덧 나는 쉽게 단념하고 냉소하는 회의주의 성향의 교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 가끔 클라우드에 저장된 옛 사진을 들춰보며 슬며시 웃고는 하지만, 근원적인 체념과 좌절을 제거해 주지는 못한다.


교육과 훈육이 안 되는 학교, 낙제와 유급도 없이 어쨌든 다음 학년으로 거의 100%로 올라가는 아이들, 심각한 멘탈 붕괴에 명퇴 날짜를 세는 교원들, 민원이 들어오거나 사고가 터지면 교사를 보호해주지 않는 관리자, 지속된 개정으로 메리트가 사라지고 있는 연금(정년 은퇴하면 월 300 받는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만들어냈던 것인가, 정년퇴직은커녕 중도 탈락 방지가 우선이다), 생활비를 쓰고 나면 겨우 소액을 저축하는 수준의 초임 교사 월급.


나는 이 모든 어둠을 속으로 삼키고, Y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운의 꿈에 부푼 예비 교사에게 굳이 먹구름을 드리울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은 터프하다. 원치 않아도 살갗이 벗겨지고, 무릎이 꺾이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진다. 학교 물정 알려준답시고 말로 백 번 경고하는 것보다, 뼈아픈 경험은 좋으나 싫으나 몸소 겪어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금 내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인 것 같다.


Y야, 교대 23학번이 된 것을 축하해.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과 걷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