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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Feb 01. 2023

아이들과 걷자

민들레 2023년 1-2월호

걷기의 마법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법 어렸을 무렵부터 나는 잘 걸었다. 도로에서 매연 냄새를 조금 맡더라도 나는 걷는 게 좋았다. 좁아터진 등하굣길 버스에서 시달리느니, 두 다리로 내가 좋아하는 속도에 맞춰 땅을 딛는 편이 백 배는 나았다. 걷기에는 뜻밖의 즐거움이 숨어 있었다.


전신주에 앉은 까치와 참새를 구경하고, 아스팔트 사이에 솟아난 민들레 홀씨를 불었다. 약육강식 정글 같은 남자 고등학교에 다녔던 나는 친구들에게 걷는 취미를 숨겼다. 걸으면서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취미는 자칫 여성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오픈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바싹 마른 플라타너스 잎을 밟을 때 땅에 깔리는 바사삭거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점점 자라며 보폭이 커지자 웬만한 거리는 버스나 걷기나 시간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걷기를 더 즐기게 되었다.


이런 나에게도 결혼 후 육아를 시작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육아는 부모의 영혼과 시간을 바쳐 아기의 숨소리가 닿는 거리에 머무는 일이라고 했던가. 나는 예전만큼 걸을 수 없었다. 어쩌다 짬이 난다고 해도 이른 새벽이거나 아기가 잠들고 난 후, 깊은 밤이었다. 나는 어둠과 피로를 핑계 삼아 걷지 않았다. 헬스장에라도 등록해서 런닝머신 위를 뛰었다면 나았을까. 별 볼 일 없는 실내에서 시시한 TV 화면을 보며 걷는다 해도 운동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아에 지친 나는 조깅화 끈을 묶는 대신 집구석 뒹굴기를 택했다. 수확은 언제나 마이너스였다. 


유튜브 개그 동영상을 보며 과자 봉지를 털어먹거나, 별 의미 없는 SNS와 웹툰, 인터넷 기사를 뒤지다 두어 시간을 죽이고 나면 그렇게 짜증이 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늘어난 옆구리 살과 수면 부족, 인생을 낭비했다는 후회였다. 산책이 사라진 인생에 드리운 부정적 감정은 그 여파가 오래 갔다. 희망의 빛은 아이가 아장아장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될 무렵에서야 찾아왔다.


큰아이는 14개월이 지났을 무렵 첫걸음마를 뗐다. 남들보다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서 벚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 걷는 아이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의 풍경이 주체적인 몸의 움직임에 따라 달리 보이는 환희를 맛본 인간의 얼굴이었다. 유모차에 누워서도 하늘 구경을 한다지만, 스스로 기운을 내어 발걸음을 옮기고 세상을 눈에 담는 기쁨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아토피가 있어 예민하고, 쉽게 잠들지 못했던 큰아이에게 산책은 약이었다. 집 근처 강변을 거닐고 온 날에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서 푹 잤다. 덜 보챘고, 피부를 벅벅 긁어 진물이 나오는 일도 적었다. 처음에는 신나게 놀다 와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지만, 덕분에 부모인 우리도 푹 잘 수 있었기에 일부러 더 자주 걷게 되었다. 육아에 도움이 되고, 부모도 즐거운 취미 찾기가 어디 쉬운가. ‘산책’이라는 인생의 치트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걷기에 재미를 붙인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원 없이 뛰고 걸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을 헐떡거리는 순간들이 쌓였다. 강원도 해안가의 소도시에는 걷기 좋은 자연이 흔했다.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를 듣고 숲에서 청설모를 구경하고 난 후, 깨끗하게 씻고 꿀잠을 잤다. 꿈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개운한 잠이었다. ‘걷기’에는 키즈카페에서 찾을 수 없는, 유튜브 영상에서 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건강하면서도 즐거운 그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요소가 대지와 나 사이를 붙들어 맸다. 


한 번 지극히 좋은 것을 경험하고 나면 만족도가 떨어지는 다른 것을 멀리하게 된다. 우리 가족에게 여가는 ‘산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걷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던 복잡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고, 전신의 근육은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둘째가 태어난 후에도 걷기 육아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커다란 가방에 젖병과 기저귀, 손수건과 도시락을 넣고서 땅이 고른 들판과 강가 그리고 호수를 걸었다. 길에는 입장료가 없기에 비용은 제로였다. 대형마트만 가더라도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도록 단속을 시키느라 진땀을 뺀다. 그러나 천은사 계곡을 따라 길게 늘어선 고목림에서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놓아둘 수 있었다. 강아지풀을 뜯으면 뜯는 대로, 제 키보다 높은 나뭇가지를 잡으려 겅중겅중 발을 구르면 구르는 대로, 마음이 편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운대도 주변에 폐를 끼칠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두 자매의 우애 증진을 위해서라도 우리 가족은 걸어야 했다. 두 살 터울인 딸들은 서로 친한 듯하면서도 자주 다퉜다. 인형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목소리를 따라 하는 작은 토끼 인형을 두고 으르렁거렸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나, 코로나에 감염되어 실내에 격리된 기간에는 다툼이 빈번했다. 자매에게 필요한 처방은 광활한 공간을 두 발로 내딛는 것이었다. 망상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신발에 하얀 모래가 들어차도록 걷고, 묵호 등대마을을 오르다 보면 자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우애를 발휘했다. 서로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 주는가 하면, 해안가에서 주운 핑크빛 조개를 나눠 가졌다. 걷기의 마법은 한 번도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학급 아이들과 10분 산책


초등교사인 아내와 나는 이렇게 좋은 ‘걷기의 힘’을 학급에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해보았다. 우리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걷기 실험의 효과가 매우 좋았으므로 학급 아이들과 잠깐씩 걸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아이들은 만날 활개 치고 다녀서 활동량이 많은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모님 승용차로 등교하고 학교 끝나면 학원 셔틀 승합차로 옮겨 다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귀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놀이 방식도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비디오 게임기, PC로 넘어간 지 오래다. 하교 무렵 학교 주변을 살펴보면, 심지어 놀이터 바닥에서 배 깔고 누워서 삼삼오오 스마트폰 게임 하는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키보드 앞까지 따끈따끈하게 데운 핫바를 대령해주는 PC방은 또 어떤가.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틈날 때마다 10분씩 걸어보기로 했다. 마침 환경도 받쳐주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3동 건물은 뒤뜰과 바로 붙어있었다. 담임까지 스물세 명이 줄줄이 알사탕처럼 쫄랑쫄랑 걸어가도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산을 깎아 만든 터라 뒤뜰도 시멘트 바닥이 아니었고,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숲이 남아있었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관목들이 오밀조밀 무릎 아래를 지켰다. 입구에는 짧지만 단풍나무 터널이 펼쳐졌고, 봄이면 군데군데 야생 달래와 냉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들 사이에 경쟁 기류가 강하게 흐르거나 축 처져 수업 분위기가 나지 않는 날이면 ‘10분 산책’에 나섰다. 점심시간 마지막 10분, 아침 활동 10분을 자주 사용했는데 아이들은 뒤뜰 나들이를 손꼽아 기다렸다. 산책길 초입의 계단을 디디면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신비한 터널 속에 들어간 것처럼 낯선 바람이 불었다. 불과 백 미터 남짓 움직였을 뿐인데 교실과 전혀 다른 공기와 분위기에 휩싸였다. 작지만 뒤뜰 또한 숲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 딸들과 천변에서 플로깅을 하듯, 학교에서는 학급의 커다란 종량제 봉투와 집게를 들고 쓰레기를 주웠다. 학교 내부의 산책로라 쓰레기가 없을 것 같지만 뒤뜰 북쪽으로 여러 채의 상가 건물과 인도가 연결되어 있어 정체불명의 온갖 쓰레기가 출몰했다. 엄지 굵기의 철근부터 솔의 눈 캔까지 초등학생이 버렸으리라고 추정할 수 없는 쓰레기가 엄청 많았다. 


나는 어린이가 생활하는 공간에 무단으로 쓰레기를 투기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할당량도 없는데 담배꽁초라도 눈에 띄면 “어! 저기 쓰레기!” 하면서 얼른 달려가 집게로 건져 올렸다. 땅속에 박힌 보일러 온수 파이프를 셋이서 잡아당겨 뽑기도 했다. 손이 더러워질 텐데도 아랑곳않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었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체육 시간보다 10분 산책을 더 재밌어하는 아이도 있었다. 종목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체육과 달리 산책은 모든 아이들에게 거의 거부감이 없었다. 학년 말에 조사한 설문지에서 1년 중 가장 좋았던 교육 활동으로 ‘10분 산책’을 꼽은 친구들이 네 명이나 되어 깜짝 놀랐다. 비율로 따지면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정규 수업도, 학급 동아리도 아니고 그저 짬짬이 쉬엄쉬엄 걸었을 뿐인데. 나는 앞으로도 반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씩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교실에는 어딘가 단정한 느낌이 감돌았다. 


걷지 않는 요즘 아이들?


10분 산책에 탄력을 받은 나는 학년 팀장 선생님과 함께 현장 체험학습으로 동네에 있는 야산 가을 등반을 추진한 적이 있다. 숲 해설사 선생님도 도와주시기로 했다. 나는 사전답사를 위해 출장을 냈다. 실제 현장체험학습 코스와 똑같이 학교에서 마을을 가로지른 후 아이들이 도착할 봉황산 활동 장소까지 꼼꼼히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부푼 마음을 안고 출발한 지 2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교문 밖을 나서자마자 위험한 상황에 수시로 노출되었다. 진한 노란색으로 스쿨존 표시가 되어 있고 신호등이 있었음에도 차들이 쉴 새 없이 학교 근처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파트 입구인 데다 학교와 학원이 모여 있으니 아이들을 실어나르는 차량과 일반 차량이 마구 뒤섞여 혼잡스러웠다. 불법 주정차는 예사고, 비상등을 켠 채 내가 사전답사에서 돌아올 때까지 도로 한 편을 막고 있는 차량도 있었다. 그나마 민식이법 도입 이후 속도를 줄여 운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학교 주변 통행로 개선 공사를 한 것이 이 정도였다.


스쿨존을 벗어나자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주택가 이면도로에는 인도가 없어 사람이 차를 피해 벽으로 붙어 다녀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택시는 쌩하니 골목을 빠져나갔다. 횡단보도에서는 황색 신호등 타이밍을 놓친 차들이 속도를 올려 기어코 적색 신호를 통과했다. 물론 보행자 신호는 녹색이었다. 나는 어른 걸음으로 10분 남짓한 길을 통과해 도착한 산 입구에서 기가 질려버렸다. 아이들 데리고 학교 뒤뜰에서 10분 산책할 때만 해도 ‘녀석들, 뭐 어렵다고 이 정도로 안 걷고 살았냐’ 같은 핀잔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걷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 힘든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은 ‘차 조심해라’ ‘좌우 살피며 다녀라’ ‘함부로 뛰지 마라’ 하는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모든 주차장을 지하로 옮겨서 지상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이상 아이들이 집 주변에서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처럼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하거나, 차를 끌고 강변 공원에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걷지 않는 요즘 아이들’이라는 편견의 밑바탕에는 ‘걷기 힘든 요즘 아이들’이라는 환경이 먼저 깔려 있었다. 


사전답사 이후 나는 한동안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 아이들이 ‘걷기’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이동 방식마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걷기에 불편한 생활 환경은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도보권은 어린이와 노인 등 우리 사회의 약한 존재부터 건장한 성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다. 누구나 하늘을 보면서 명랑하게 산책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안전하고 즐거운 도보권을 천부인권 중 하나로 집어넣고 싶을 정도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의 힘이 센 요즘 세상은 돈으로 쉽게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고, 지갑이 얇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하지만 걷기는 주머니 사정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등한 운동이다. 계절감을 느끼며 꾸준히 규칙적으로 걸어주기만 해도 사람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최근의 뇌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걷기는 두뇌 활동을 자극해 창의성을 높여주며, 기분을 전환하는 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돌아오는 새 학기에 새로운 학급의 담임을 맡으면 아이들 등하굣길 조사를 좀 해보려 한다. 위험한 곳은 없는지, 인도가 끊긴 곳은 없는지 체크해서 아이들이 밟고 다니는 길을 직접 챙겨 봐야겠다. 필요하면 시장님한테 편지라도 써서 길을 고쳐달라고 건의해야겠다. 어린이의 학교 가는 길이 바뀌면, 그 길을 함께 쓰는 시민들도 한결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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