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고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수 Feb 01. 2024

관계의 언어

청년zip중 - '나의 관계' 이야기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알 수 있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다. 한 개인을 파악하는 방법은 여럿 있다. 무엇을 먹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을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기준을 사용한다. 그러나 삼십 대 후반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었느냐가 특정 시기의 나를 가장 정확히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십 대 시절의 나는 그저 친구가 필요하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애써 친구를 만들려고 했다. 함께 무리 지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오락실을 다니고, 쓸데없는 농담을 나눴다. 성격이나 취향이랄 것도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어울리기에 불편하지 않거나 낄낄거릴 수 있으면 됐다. 그래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거나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어차피 십 대는 대학 입시를 위한 단단한 계단 같은 것이었으니까. 밥 먹고 숨만 쉬어도 자동으로 학년이 바뀌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이라 주입받았으므로 중간에 친구가 몇 번 바뀌어도 내 삶의 큰 방향성은 바뀌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관계의 양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수능을 치고서 처음으로 휴대전화를 갖게 되었다. 인터넷 홈페이지라는 것도 운영하게 되었다. 등교하면 친구들이 교실에 앉아있던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부터는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관리하고, 문자 메시지를 넣으며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했다. 


나는 스무 살 이후의 인생에 적응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 주민등록상 어른이 되었기에 주도적으로 인생을 설계해 나가는 것이 맞았다. 그렇지만 내 몸은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의 오프라인 관계망에 훨씬 익숙했다. 나는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고등학교 친구를 다시 찾거나, 대학교 과 동기 모임에 몰입했다. 이상한 춤을 추고 개그로 사람들을 웃기려 애썼다. 과도기의 어색함을 감추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오프라인 관계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굉장히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대학 친구들이 별로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꽤 재밌고 착한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지난날을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술집에서 무수한 밤을 썩히다 보면 금세 답답해졌다. 약간이라도 더 훌륭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어른은 이른 나이에 독립하여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한참 모자랐다. 멋진 사람에게 영감을 받아 성장하고 싶었다. 전설적인 멘토를 만나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 퀸카가 갑자기 나에게 고백할 확률이 0%인 것처럼, 인생의 구원자가 저절로 나타날 리 없었다. 


사실 어떤 관계가 인생을 나아지게 할지 뚜렷한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막연히 관계의 질이 바뀌길 원했다. 적어도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퍼마시고, 답도 나오지 않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배틀넷을 전전하는 관계망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지적으로 자극받고, 엄청난 통찰을 주는 관계를 맺기 힘들었다. 나의 역량이 낮고 인맥이 얕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자극과 인간관계에 목말라 있었던 나는 나름의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교수님과 진지하게 상담을 시도하려 하면 무섭게도 대학원 입학을 계속 권유하셨다. 주변에서 대화를 나눌 선후배라 해보았자 고만고만한 내 또래였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책을 많이 읽었다. 십 대보다 훨씬 많이 읽었다. 플라톤의 향연이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같은 책도 태어나 처음으로 완역본을 정독했다. 예전에는 시험을 잘 보려고 요약본이나 해설서를 읽으며 답안지 작성법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위대한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서 보았다. 한 권을 읽는데 오래 걸렸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심정으로 ‘중세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 옛 기사도 정신을 실천하려는 돈키호테의 인생은 행복한 것인가, 멍청한 건가’ 같은 메모를 남기며 고민했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은 까닭은 누군가의 생각에 깊이 동조하는 것도 일종의 관계맺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프라인은 상황, 시간, 장소에 따라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글은 달랐다. 같은 사람이라도 면대면으로 만날 때와 그 사람이 운영하는 미니 홈페이지에서 만날 때는 별도의 인격체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간극에 큰 흥미를 느꼈다. 과거에는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인간관계였다. 누군가의 게시글에 댓글을 다는 나조차 오프라인에서와 다른 말투를 썼다. 


어느 쪽이 인간의 진실을 더 잘 대변하는가. 애주가는 거나하게 취해서 하는 말이 본인의 진심이라고 했다. 반면 낯가림이 심한 어느 내향인은 온라인 공간에 쓴 문장이 진짜 자기모습이라고 밝혔다. 


어느 쪽이 맞는지 나는 단언할 수 없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면 ‘문자의 형태로 된 관계’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나는 예전만큼 땀 흘리며 축구와 농구를 하지 않는다. 피씨방은 언제 갔는지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어봐야 하고, 일과 가족을 챙기느라 새벽까지 마시는 날이 매우 드물다. 일상에서 친구와 잡담을 나누는 시간은 거의 없고, 사회생활에서 만난 지인과 일 이야기를 한다.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관계망이라 해봐야 여러 채팅방과 SNS로 접하는 사진과 문장이 대부분이다. 이제 나에게 인간관계란 문자와 사진이 90%, 나머지가 오프라인 접촉이다.


딱히 슬프거나 비참하지는 않다. 굳이 말로 침을 튀겨가며 떠들지 않아도 어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맺을 수 있는 관계의 흐름과 온라인에서 형성할 수 있는 관계의 양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이가 먹어서 좋은 몇 안 되는 깨달음 중 일부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청년기에서 벗어나게 되겠지만 괜찮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청년기도 나쁘지 않았던 것처럼, 더 나이를 먹은 장년, 중년, 노년의 나도 살만하지 않을까. 좋은 인연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물 좋아하세요? 올해는 '새 구경 걷기' 어떠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