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소스 맛으로 먹었던 음식이 많았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아차렸다. 나는 초장에 회를 푹 찍어 먹었고, 치킨 양념이나 시즈닝이 된 메뉴를 선택했다. 핫도그에는 케첩과 허니 머스터드를 꼭 발랐다. 이런 형편이니 같은 양념으로 조리한 명태 강정과 닭 강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환상의 짝꿍 운운하며 자극적인 소스를 즐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에는 식사 대용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리지 않았다. 샐러드 양이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큰 샐러드볼에 양상추, 바나나, 사과, 구운 표고버섯, 토마토, 딸기, 렌즈콩을 꽃바구니처럼 쌓아놓고 먹었다. 요즘의 아침식사다. 소금과 후추를 뿌려 구운 표고버섯이 있으니 드레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스테이크 샐러드에 과한 드레싱을 첨가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식탁에 올려 둔 오리엔탈, 요거트, 시저 드레싱은 그대로 냉장고로 돌아갔다.
구입해 둔 드레싱을 다 먹으면 기성품 드레싱은 추가 구매 하지 않을 계획이다. 대신 샐러드에 올리브유와 후추를 살짝 곁들여 볼까 한다. 유튜브에서 정재형 씨가 그런 방식으로 샐러드를 심플하게 먹는 것을 보았다. 심심하게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가볍게 쓱쓱 톡톡, 무척 끌렸다. 샐러드에 양질의 재료를 쓰면 각각 고유의 맛이 잘 느껴진다. 야채의 소비기한이 임박하다면 모를까 싱싱한 상태에서는 드레싱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체감하고 있다. 아마도 고기가 줄어든 식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식탁에서 채식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늘어난 지 꽤 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 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시작은 현미밥이었다. 어떤 비건 에세이의 문장이 계기였다. 백미와 현미를 절반씩 섞어 먹기만 해도 건강해진답니다! 밥부터 바꿔보세요.
나는 간단한 건강비법을 좋아한다. 현미밥은 수고스럽지 않았다. 현미 두 번, 백미 두 번. 그렇게 쌀을 퍼 똑같이 전기압력밥솥에 안쳤다. 현미밥은 구수했다. 입 안에서 조금 까끌거린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괜찮았다. 3개월이 지나 체중이 1kg 줄었다. 결혼 후 서서히 우상향 하던 체중 그래프가 처음으로 각도를 아래로 꺾은 것이다.
현미밥을 먹으면 식사 시간이 다소 늘어난다. 섬유질이 많아 오래 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백미보다 단맛은 덜하나 포만감이 지속되는 장점이 있다. 허기가 지지 않으니 자연스레 군것질 횟수가 줄어든다. 현미밥 이외에 다른 변수 없이 체중이 감소한 이유였다.
몸이 가볍다는 건 참으로 행복했다. 똑같이 출근하고, 육아해도 덜 피곤하였다. 피곤하지 않다는 것은 어린 두 아이를 양육하는 맞벌이 가정에 있어 축복이다. 진하게 내린 커피도 훌륭하지만, 과하면 부작용이 있다. 그렇지만 현미밥은 안전했다. 부모가 피곤하지 않아야 아이에게 친절할 수 있다. 밤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 몇 쪽 읽으려 해도 체력이 남아 있어야 했다. 현미는 엄마 아빠의 체력을 증진시켜 주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나와 아내는 궁금했다. 내면에서 느껴지는 활력의 정체는 뭘까. 분명 무언가가 내 안에서 변했다. 컨디션이 좋다는 말로 얼버무리기에는 확연한 감각이었다. 푹 잔 것처럼 산뜻한 기운. 우리는 현미밥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 보자고 뜻을 모았다. 변화의 방향은 현미밥에서 힌트를 얻었다. 가공이 덜 된 음식을 먹자.
우리는 아주 뿌듯한 마음으로 일반 식빵 대신 통곡물 식빵을 집어드는 사람이 되었다. 건강식을 꾸준히 해온 사람이 보기에는 우스운 선택일 것이다. 식빵도 밀가루로 만들었으니 가공식품이다. 코웃음을 친다고 해도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빻는 것 또한 가공의 한 종류가 맞다. 그럼에도 당시의 우리 부부에게는 통곡물 식빵이 실천가능한 건강식 범위였다. 천천히 그러나 길게 가자. 스텝 바이 스텝.
그렇지만 건강식을 향한 발걸음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바뀐 것이 거의 없었다. 가령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조건반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신선한 과일 샐러드로는 출장과 야근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교촌 허니콤보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기름내 정도는 코에 닿아줘야 "아, 바로 이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과자도 끊지 못했다. 새우깡과 양파링은 찬장에 항상 재고가 있었다. 과자와 야식은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음식이다,라는 고정관념은 유령처럼 내게 깃들어있었다.
내가 양파링을 즐겨 찾았던 이유는 양파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양파는 멋진 채소다. 구운 빵에 발라먹는 양파잼은 근사하고, 양파튀김도 매우 좋다. 지금은 사라진 메뉴지만, 예전에는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 블루밍 어니언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양파는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행복한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양파링도 몸에 좋을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무의식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양파맛 시즈닝 소스의 혀 속임에 홀딱 넘어가 버린 것이다. 양파링을 떠올리는 순간 입에 맴도는 바로 그 맛에.
감자튀김과 핫도그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 두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튀긴 탄수화물과 케첩의 조합을 괜찮은 맛이라 인식했던 것이다. 튀기고, 달고, 짜고. 본능적으로 인간의 몸이 탐닉하는 음식은 세 가지 조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행이라 할지 지금의 내 입맛은 최악의 구간을 빠져나온 것 같다. 말랑말랑해졌다고 할까. 음식을 담백하게 즐기려면 혀를 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중독 치료다. 게임, 도박, 휴대폰 등 중독 치료의 근간은 '차단'이다. 혀도 순한 음식을 주로 먹으면 섬세해진다. 프랑스는 미각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치원 무렵부터 다양한 음식 재료의 맛을 경험하게 한다. 가공식품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온 재료의 향과 맛, 질감을 느끼도록 한다. 눈을 감고 당근, 오이, 셀러리를 차례로 먹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란 어린이는 자연의 다양한 먹거리를 편견 없이 즐기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지 않을까.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국민답다.
나도 샐러드를 장기 복용하면서 잎사귀의 맛을 차츰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쌉싸래한 것은 케일, 아삭거리는 건 양상추, 보드라운 질감은 버터 상추. 나에게 초식동물은 신비한 존재였다. 들판의 하고 많은 풀 중에서 어떻게 맛난 풀만 냠냠 먹을 수 있는가. 그런데 풀에 맛을 들이니 자연스레 토끼와 사슴화가 진행되었다. 녀석들, 맛난 풀이 따로 있구나.
육식 마니아는 닭, 오리, 돼지, 말, 양, 소의 고기 맛을 구분한다. 미세한 질감과 향이 다른 것이다. 스시집 단골은 초밥에 간장을 듬뿍 찍지 않는다. 주인장이 내어주는 스시를 믿고 살짝 끝만 간장에 닿게 한다. 샐러드도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드레싱의 자리가 좁아진다. 드레싱의 강한 풍미에 재료의 맛이 죽으면 곤란하니까.
어느 음식 분야든 정통해지면 재료 고유의 특성을 즐기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다. 소스는 어디까지나 원재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부재료. 싱거운 요리는 간을 더하면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먹기 힘들다. 부족함과 넘침, 둘 다 온전하지 못하지만 굳이 하나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한다면 부족함의 손을 번쩍 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