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에서 '정상 체중'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삼십 년 만이었다. 체형을 두고 정상을 운운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며 차별적이라는 관점은 잠시 논외로 두겠다. 나는 단지 홀가분했다. 군살이 줄어서.
내 인생의 과반은 뚱보의 삶. 나는 때때로 폭식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어린 시절 앨범의 나는 비주얼 면에서 들쭉날쭉하다. 취학 전까지는 나쁘지 않다. 잘 웃는 남자애다. 그야 '정상' 체중 범위였으니까. 귀염성도 있고, 정돈된 느낌이 난다. 반면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앨범을 휙휙 넘기고 싶어 진다. 과체중을 가운데로 하여 비만과 일시적 정상이 번갈아 나타난다. 단지 살이 쪄서 보기 싫다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취약한 상태의 내가 반영되어 있어 보기 힘들 뿐이다. 불안으로 인한 폭식,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표시가 난다.
마음이 힘든 날에는 많이 먹었다. 인간은 달콤하거나 기름진 고칼로리 음식을 마구 먹는 방식으로 불안을 달랠 수 있다. 수렵 채집 시기의 습관이 남아있는 유전자는 고열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살이 찌는 음식을 잔뜩 먹으면 반사적으로 도파민이 나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그것이 도파민인 줄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입에 음식을 넣는다.
뚱보의 하루는 간식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의 맛난 것'을 생각했다. 학원 다녀오는 길에 초코 다이제를 먹어야지. 저녁은 마늘향 페리카나 양념치킨이야. 간식 타임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나름 성실히 살아가주는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하루치의 선물.
별 신나는 일 없는 삶에서 먹는 것만큼은 확실히 보상이 되어 주었다. 오락실을 다니고, 만화를 보고, 쮸쮸바를 빨면서 살았다. 도파민 관리가 안 되는 비만 남자아이. 내성적이면서도 충동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힘들었음에도 뚱보의 라이프 스타일을 극복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로 미숙한 아이였으니까.
그래도 폭력이나 마약, 본드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인간은 위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떤 돌파구는 근원적으로 몸과 마음을 파괴한다. 뚱보의 길은 그나마 온건한 방식에 속했다. 가경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지 않고, 범죄도 아니다. 오히려 '나중에 다 키로 간다'는 어른의 격려 속에 안정적으로 도파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간식의 가격대가 다양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남녀노소 부귀빈천을 가리지 않고 간식의 세계는 열려있었다. 내가 원하는 집을 사려면 굉장한 비용이 들어간다. 저축으로는 접근이 힘들기에 상당수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가능하다. 움직이는 나만의 공간, 자동차도 비싸다.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경차도 천만 원 이상부터 시작한다. 어지간한 경제력으로는 자가, 자차를 구입하고 운영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군것질은 문턱이 낮다.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는 바 형태로 된 하드가 팔백 원이다. 인플레이션이 경주마처럼 폭주하는 2024년에도 백 원 여덟 개만 내면 더위를 식힐 수 있다. 지갑의 두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메로나를 먹다가 옆에 있는 친구가 먹고 싶어 하면 선뜻 사줄 수도 있다. 팔 백 원어치의 아량은 비교적 쉽게 베풀 수 있으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이 세상의 평화를 지켜주는 간식을 사랑했다. 떡볶이 국물에 찍어주는 김말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뚱보의 삶은 내게 필연이었다. 십 대의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힘들었다. IMF 이후 우리 가족은 빚에 시달렸다. 그리고 나는 소상공인의 첫째 아들이었다. 동생은 음악을 하다가 중간에 진로를 바꿔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빡빡한 시절이었다. 나의 목표는 오직 대학생이 되어 독립하는 것. 얼른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전공이어야 했고, 기왕이면 학비 싼 국립대여야 했다. 나는 예체능 대비 가성비가 뛰어난 공부에 승부수를 띄웠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고졸이셨고 정직한 분들이었다.
세상의 노동 시장은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고소득과 안정성을 보장받는 상위 20% 직업과 저소득과 불안정성으로 점철된 나머지 직업. 하는 일에 귀천은 없다고 했으나, 경제적 보상에는 상하가 뚜렷했다. 경제력이 신분제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내가 노린 것은 공직에 진출하는 루트였다. 시험에만 합격하면 일정한 삶을 약속해 주는 공직. 가늘고 길게 가는 삶이었다.
최근에는 경쟁이 약해졌지만, 내가 교대에 가려던 2005년에는 제법 분위기가 치열했다. IMF의 망령이 사회 전반을 떠돌고 있던 시기라 다들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고용을 보장해 주는 교직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는 월드콘과 새우깡을 도파민 보급제로 삼아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었다. 혈액 건강이라든지 몸매 관리는 후순위였다. 매점은 나만의 생츄어리. 성실하게 간식을 섭취했다. 어차피 한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하루 여덟 시간 이상 자면서,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교과서 위주의 공부로는 고교생활이 불가능했다. 미친 시기의 미친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자발적으로 뚱보가 되었다.
고3 무렵 구십 킬로그램에 육박했던 체중은 대학생활 시작과 동시에 빠졌다. 몸을 망칠 정도로 간식을 먹어야 하는 계기가 사라졌으므로. 나는 대학 생활을 느긋하게 보냈다. 기괴한 수능 변형 문제를 푼다고 인생을 낭비했으니 균형을 바로 잡을 차례였다. 끌리는 책을 손이 가는 대로 읽었다. 연애를 하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이에 대한 기회비용으로 학점을 희생했다. 졸업 무렵에 보니 10등급 중 8등급. 9등급이라 예상했는데 높게 나와서 기뻤다.
성인이 된 이후 나의 간식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때때로 양파링을 먹고, 액상과당이 듬뿍 들어간 커피 음료를 먹었지만 중독은 면했다. 몸무게도 팔십 킬로그램 초반에서 머물렀다. 과체중 초입 단계. 욕심을 내어 체중을 줄여볼까 했지만 쉽지 않았다. 출장을 다니고, 회식을 하고 나면 몸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맞벌이와 두 아이 육아를 병행하면서 어느 정도 정신적 압박이 있었다.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대신 소소한 간식으로 기분을 풀었다.
그러다 2022년에 육아휴직을 하면서 깨달았다. 마침내 몸이 간식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애를 써서 할 무언가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표도 사라졌다. 집안일이 늘고, 아이를 돌보아야 했지만 전에 비할 바 없이 자유로웠다. 나는 해안 숲과 호숫가를 걸었다. 한 번쯤 도전하고 싶었던 하루 한 끼 이상 채식도 했다. 고요히 명상에 잠겨 흘러가는 시간과 상념을 지켜보았다. 편안한 흐름이었다. 어느새 나는 과하게 먹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밥도 간식도.
오늘 아침에는 스테비아 토마토, 바나나, 오이, 양상추, 양배추, 딸기, 병아리콩을 가득 담은 샐러드를 먹었다. 그러다 입이 궁금해서 구운 아몬드를 한 줌 입에 털어 넣었다. 고소하고 향긋했다. 요사이 간식은 내 생활 상태를 점검하는 지표가 되었다. 진한 치즈 케이크나 스타벅스 슈크림 라테가 당기면 돌아봐야 한다. 뭔가 몸을 긴장하게 만들고, 무리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뭐가 어떻게 힘든지도 모르고 음식을 욱여넣던 뚱보 아이는 삼십 년 만에 정상 체중을 되찾았다. 덜어낸 지방의 무게로 턱걸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산책길에서 안정을 찾는다. 명상을 하다가 내가 집착하고 있던 생각을 발견하고 놓기도 한다. 줄어든 체중보다 더 좋은 건 평온함. 영혼의 형태라도 과거의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몰래 안아주고 싶다. 다 잘 될 거라고. 고생 많았고, 아직 고생이 좀 더 남았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뚱보를 격려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