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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2025.11.19

by 이준수

김유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작가가 되려면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기에 늘 궁금했다. 어떻게 개들이 마음을 씻으러 가는 목욕탕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 마을버스가 마음버스로 바뀔 생각을 어떻게 했지? 의문이 풀렸다. 김유 작가는 많이 걷고, 많이 메모하는 사람이었다. 많이 걸으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턱걸이를 하면 광배근'이 커진다와 같은 원리다.


걷기라고 해서 모든 걷기가 같지는 않다. 나는 헬스장 같이 닫힌 공간에서 트레드밀에 올라가 있지 못한다. 야외에서 운동할 여건이 되는 한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편이다. 똑같이 뛰고 걸어도 트레드밀은 덜 행복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걷기에는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 머리 위로 노란 은행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을 잡으려면 밖에 있어야 한다. 대추나무에 달린 대추가 쪼글쪼글해져 할아버지가 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생이다.


걷는 사람, 이 단어가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다. 빨래를 돌려놓고 잠시 나와 밤에 걷고 뛰었다. 내뱉는 숨마다 하얀 김으로 나왔다. 늦가을의 밤은 겨울이나 다름없었다. 첫 삼 분은 공기가 차지만 빠른 속도로 걷다 보면 어느새 땀이 난다. 나는 지퍼를 열었다 닫으며 걷고 뛰었다. 자동차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자동차의 실내는 사계절 온도 차가 크지 않다. 냉난방 공조장치는 편리하지만 계절감을 무디게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다.


치즈색 고양이 한 마리가 맹렬한 속도로 수풀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둑어둑한 밤을 배경으로 고양이는 치즈색 빛줄기로 보였다. 쥐라도 본 걸까. 동네 캣맘 분들이 종종 사료를 주던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고양이도 자기 발로 사냥한 먹이를 먹고 싶지 않을까. 신경을 최대한 집중해서 사냥한 뒤에 찾아오는 기분 좋은 나른함이 고양이에게도 있을 것이다.


탈것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환경을 '정보'로 받아들이지만, 느리게 걷는 사람은 환경을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경험이 풍부한 작가가 글을 잘 쓰는 건 당연한 이야기. 김유 작가는 진실을 말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 27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허벅지가 아픈 경험을 했다. 뭐, 이것도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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