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에 걸려 아픈 날 쌀밥을 오래 씹으니 향이 났다. 단맛이 퍼졌다. 김치나 된장의 향에 가려있던 쌀 고유의 맛이었다. 그 날의 경험이 강렬하여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 우연히 국어 수업 시간에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은빈이가 '집 안 치우기'라는 교과서 본문을 읽을 차례였다.
"누우나~ 배고프다. 토스트 먹자!"
등장인물의 첫 대사를 읽는데 교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귀를 쫑긋거렸다. 오디오 드라마를 진행하는 성우인 줄 알았다. 보통 사춘기를 앞둔 아이들은 부끄러움이 많아 무미건조한 어투로 글을 읽는다. 특히 학년이 높아질수록 그런 경향이 있는데 은빈이는 예외였다. 그녀는 책 내용에 푹 빠져 목소리를 변조시켜가며 신나게 읽었다. 놀기 좋아하는 남동생과 착실한 누나, 화가 난 엄마의 모습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나?'
수업 준비를 하면서 본문을 두 차례 묵독하였다. 사건의 흐름도 파악하고 이어질 뒷 줄거리도 생각해보았다. 그만하면 2차시 수업 준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은빈이의 음성을 통해 재확인한 '집 안 치우기'는 전혀 다른 글이 되어있었다. 눈으로 훑을 때는 몰랐던 단어의 리듬감과 문장 곳곳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가 드러났다. 글의 참맛을 즐긴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에 은빈이가 국어책을 보고 있었다. 뭐라 뭐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아까 수업 시간에 읽은 '집 안 치우기'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고 있었다. 어려운 낱말과 쉬운 낱말에 모두 노란색이 칠해져 있었다.
'세계 일주, 뒤죽박죽... 이 정도 단어를 모를 애가 아닌데?'
평소 은빈이의 어휘 수준을 알고 있기에 의아했다.
"은빈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니?"
"아니요. 그런데요 선생님, 이 작가는 엄마일 것 같아요. 세계일주 이거 부루마블 게임이잖아요. 아이들을 너무 잘 알고 있네요."
그랬다. 은빈이는 조용히 소리 내어 읽으면서 작가가 왜 이런 표현을 썼는지 확인 중이었다. 마음에 드는 구절에는 밑줄이 그어 있고 질문도 적혀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쌀밥의 향을 떠올렸다. 오래도록 씹고 음미하면 입 안 메아리처럼 퍼지던 은은한 쌀 내음.
은빈이는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을까? 책도 인생도 읽어 해치우는 게 아니라 느끼고 향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11살 여학생의 작은 등이 대견하고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