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기고글

잘 놓인 철길 같은 하루

느리고 덜컹거려도 제 갈길 잃지 않는 기차처럼

by 이준수
도계역 플랫폼은 평화롭다.


15시 47분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끊었다. 도계역에서 동해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플랫폼에는 승객들이 저마다 편안한 자세로 서있었다. 곱게 화장한 아주머니는 연신 거울을 쳐다봤고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커플은 정답게 속삭였다. 역무원은 노란 정지선 앞에서 하품을 하였다. 탄광촌 기차역에서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코레일 직원은 무료해 보였다. 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도착했다. 3호차 29번 좌석에 앉아 잘 놓인 철길을 따라왔다.


덜컹 덜커덩 취이 촤촤


기분 좋은 소리가 박자감 있게 들려왔다. 창밖 보리밭에 벚꽃잎이 흩날렸다. 승용차로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늦봄의 풍경이었다. 덤프트럭의 사나운 운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고, 도로에 파인 구멍을 피하느라 핸들을 틀 필요도 없었다. 두 개의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철마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신기역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꽃을 바라보다가 아득해지며 잠이 들었다. 동해역 도착을 알리는 방송에 눈을 떴다. 내릴 문은 오른쪽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짐을 챙겼다.


동해역 플랫폼엔 역원들이 나와 안전을 점검했다.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대합실을 통과했다. 2600원을 내고 경험한 짧은 여행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사회가 내게 부여한 온갖 귀찮은 역할들은 내버려두고 푹 퍼져있었다. 나른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가끔씩 일부러라도 기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해역에서 쇄운동 부영아파트 우리 집까지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 아저씨는 DMB로 드라마를 힐끗거리며 택시를 몰았다. 시내버스를 추월할 때는 얼마나 가까이 스쳐가는지 버스 표면의 페인트 질감이 선명했다. 동네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보지 못했다. 5km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인데 택시비로 3900원을 냈다. 기차 탄 기억이 꿈만 같았다.


인생이 기찻길 같으면 좋겠다. 너무 요란하지 않게, 남들보다 아주 빠르 않아도 꽃나무 피고 지는 모습 챙겨보는 여유가 있기를. 원하는 목적 잘 기억하고 이리저리 헤매지 않기를. 때때로 난폭운전 택시 같은 하루도 오겠지만 가슴속 느리게 가는 기차 한 대쯤은 품고 사는 사람이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