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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왜 책에 낙서를 하세요? 책이 더러워지잖아요."
"내 책이니까 괜찮아. 나는 쓰면서 읽는 게 좋아."
겨울철 오후 햇볕을 쬐며 책을 읽는데 집에 가던 다한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다한이는 늘 두 가지를 궁금해했다. 하나는 왜 선생님은 책을 돈 주고 사서 보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왜 책에 밑줄을 긋고 글씨를 쓰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궁금증의 대답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돈 때문이었다. 용돈이 넉넉지 않았던 학창시절, 나는 당연히 책을 빌려봤다. 공짜로 나오는 교과서나 학습용으로 산 문제집이야 이것저것 끄적거리며 본다고 해도 빌린 책에 흔적을 남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행복에 집중하지 않으니 행복하다(달빛 아래 가만히, 73쪽)" 같은 문장을 만나면 작가에게 뭐라 대꾸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대꾸하고 싶음'은 말로 채울 수 없었다. 대꾸는 반드시 필기구로 손글씨를 남기고 활자화된 생각을 확인하고 나서야 종결되었기에, 좋은 책을 빌려 읽는 건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거의 쉬지 않고 한 건 데이트 비용과 책값을 대기 위함이 전부였다. 그러다 가끔 지칠 때면 나도 글 써서 책 내면 인세 받고 원하는 책 실컷 사보면서 얼마나 신날까 하고 망상에 빠졌는데 금세 고개를 저었다. 책은 나 정도의 사람이 쓸 수 있는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벚꽃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떨어질 때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봄을 기다린다. 곁에 잠시만 있어준다 해도.(우리는 사랑을 사랑해, 13쪽)" 비슷한 표현을 공책에다 닥치는 대로 썼다. 나 따위가 책은 낼 수 없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진심이었고 이 마음을 기록해두지 못하면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남겼다.
나는 왜 그 마음들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도 못 올리고 공책에만 써야 했을까? 일반 공책에 글을 썩히기가 아쉬워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가서 사온 이만 삼천 원짜리 고급 수제 공책에 옮겨 적을 정성이었으면 출판사 투고라도 해봤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며 부질없는 질문을 십 년이 지나서야 던져 보았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내가 들고 있는 손바닥만 한 수첩을 봤다. 딱 봐도 책 살 때 끼워주는 굿즈 메모장이었다. 표지 색감이 부드러워 제법 괜찮네 하고 펼쳤는데 글씨가 쓰여있었다.
바람에 꽃들이 흔들린다. 길을 걷다 가만히 서서 보는데 괜히 나도, 흔들렸다(달빛 아래 가만히, 51쪽).
왼쪽은 백지, 오른쪽은 딱 이 문장 하나. 이상한 메모장이었다. 다음 장을 넘기니 다시 문장이 나왔다.
여름은 초록. 파랑보다(달빛 아래 가만히, 53쪽).
짝수 쪽에는 글씨가 전혀 없고, 홀수 쪽에만 약간 활자가 있었다. 얼빠진 표정을 짓자 아내는 김종완 씨가 만든 <달빛 아래 가만히>와 <우리는 사랑을 사랑해>를 배송비까지 15000원 주고 샀다고 했다. 그러니까 메모장이 아니라 책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책은 나도 만들겠다고 했다. 아내는 깔깔 웃으며 "책을 우습게 안다고" 콧방귀를 뀌었다. 놀라운 건 사전적인 의미로 김종완 씨가 글부터 디자인, 제본까지 직접 다 했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책이 세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김종완 씨 얼굴은 모르지만 한 남자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프린터에서 뽑고, 종이 본드 칠 하고, 제본 기계로 규격 맞춰 자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가내수공업으로 출판하는 장인의 손길. 색종이로 학도 못 접는 주제에 작가님께 망언을 해서 죄송스러웠다. 첫 장부터 천천히 넘겼다. 종이가 겉보기에는 재생지 같은데 표면이 거칠지 않고 보들보들했다. 대신 '책배(책등 반대) 부분은 1밀리미터 정도 오차가 있어 섬유질 조직이 까슬까슬 일어나 있었다.
다른 책이었으면 뭔 인쇄 상태가 이러냐고 타박했겠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작두 칼로 종이를 썰었을 김종완 씨를 떠올리니 아날로그 맛이 났다. 책 내용은 더 했다.
감기에 걸렸는데 기분이 좋다.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 걸까?(우리는 사랑을 사랑해, 71쪽)
부루펜을 먹고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는데, 작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두 문장을 위해 한 쪽을 비워두고 다른 한쪽에만 툭 써서 다음 장으로 넘어갈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글을 적고 인쇄하고 편집한 김종완 작가는 이런 짓을 반복해서, 꽤 근사한 책 두 권을 지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독립출판으로 책을 냈다가, '디자인이음'에서 정식 출판했다고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모를 '비싼 공책' 생각이 났다. 작은 마음도 책이 될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출판 시도라도 해봤을 텐데 그러지 못한 나는 누군가의 작은 마음을 담아 만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김종완 작가의 책에 아무것도 적고 싶지 않았다.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기역 자도 쓰지 않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다한이는 선생님이 더럽게 보지 않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면 놀라겠지? 더군다나 메모장처럼 생겼는데 아직 밑줄 하나 긋지 않은 책이라고 하면 어떻게 쳐다볼까. "이런 책은 나도 만들겠다."라는 말이 민망하고 미안해서 작가님 작품에 손을 못 대겠다. 김종완 씨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정말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뭘까? 나는 궁금하다(달빛 아래 가만히, 33쪽)."라고 했는데 왠지 그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계속 책을 만들 것 같다.
달빛 아래 가만히, 우리는 사랑을 사랑해. 두 책에 편안하게 낙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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