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이여! 빛이시여!
'하얼빈'을 보고
하얼빈은 중국 도시다. 2차세계대전 이후 한때 러시아가 점령한 적이 있었고 대륙 횡단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지만 지금은 중국에 속한다.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지나가지 때문에 지금도 하얼빈은 이국인이 많이 사는 도시다. 하얼빈은 광활한 만주의 일부이기도 하다. 만주는 한때 고구려의 땅이기도 했지 않은가! 이토록 하얼빈은 여러 민족이 거쳐갔고 현재에도 여러 민족이 산다.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독립군 장군은 이방을 저격했다. 그래서 하얼빈은 한국인들 기억에 있는 중요한 도시다. 역사책에 나오는 곳이므로. 독립운동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기에. 하얼빈이 중국땅인지 러시아 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안중근과 하얼빈은 한 단어처럼 입에 붙어있다. 한국인에게는.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과 독립군 들이 함경도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안중근 장군은 사로잡은 몇명의 일본군을 만민법에 따라 ('생포한 포로는 놓아준다') 살려 보내준다. 이들을 놓아주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독립군 장군들이 있었다. 그 중 이창섭 장군이 대표적인데, 안중근이 적들을 풀어주자 그는 자신의 부대를 데리고 안중근을 떠나고 만다. 풀려난 일본군 중에는 모루라는 일본군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목숨을 구해준 안중근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안중근을 집요하게 쫓는 추격자가 된다. 결국 안중근 부대는 풀려난 일본군 포로들이 몰고온 일본군 대부대의 습격으로 몰살을 당한다. 이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안중근은 자신의 신념으로 동지들을 죽게 된 것을 자책하며 죄책감과 좌절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며 절규하는 안중근 모습은 대자연 아래 한없이 작고 약한 인간을 상징하는 화면이었다. 안중근은 '지금 살아남은 이 목숨은 내것이 아닌 먼저간 동지들의 것이다'라는 걸 불현듯 깨닫는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생이 아닌 먼저간 동지들의 생을 살기로 마음먹고 그 동지들의 염원을 이루기위해 다시금 독립군에 합류한다. 이국땅 깊은 어둠 속 아지트로 다시 돌아온 안중근을 독립군들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아왔어?' 옥신각신 불신을 던지며 의심하던 동지들은 때마침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이방을 척결하자는 계획을 제안한 안중근과 의지의 고통도 불사하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보며, 마침내 함께 하기로 결의한다. 이방, 그는 당시 조선을 합방시킨 일본의 총리였으며 정한론자의 선두주자로 조선인에게는 빛을 빼앗아 간 적의 수괴였다.
나라를 잃은 오갈데 없는 망국민들은 이국땅에서 혹은 조선땅에서도 빛을 잃은 채 살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빛이 들어오면 어디로 어떻게 몸을 숨겨야 할 지 항상 전전긍긍하며 그렇게 삶인지 죽음인지 모르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어둠, 피, 담배연기, 술, 수염에 비친 빛이 공허하게 흔들릴 때, 그곳에 모인 그들이 사람임을 알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안중근이 지휘한 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한 전투 장면, 전투에서 생포한 일본인 포로를 만국법'의 원칙하에 풀어주는 장면, 그리고 생포한 포로들을 풀어주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부대를 떠나는 일부 독립군들과 풀려난 일본군들이 끌고온 대부대의 습격을 받아 안중근 부대원들이 몰살을 당하는 장면, 용케 살아남은 안중근이 단말마의 비병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안중근이 부대원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넓디 넓은 꽁꽁 언 광활한 대동강 강 위를 헤메이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생포한 포로를 풀어줘서는 안된다고 했던 이창섭 부대는 안중근 부대를 떠났고, 우덕순과 김상현은 안중근 곁에 남았다. 안중근 부대원들이 습격을 당해 몰살당할 때, 우덕순, 안중근, 김상현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은 자는 밀정이라 의심받을 수 있다. 혹시 그들중 누군가 밀정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중반에 접어들어 어두침침한 독립군 아지트에서 이방 암살 모의를 나누는 장면이다. 오랜만에 나타난 안중근을 보며 동지들은 그를 의심했다. 그리고 부대원들을 잃은 안중근을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생을 포기한 안중근은 동지들과 조국의 원수인 이방 척결을 제안했다. 이방을 죽이기 위한 계획은 정해졌고 함께할 동지들도 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 하얼빈으로 떠난다.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동지들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동지를 잃는다. 동지들 중에 일본군 끄나풀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독립군들은 성공을 위해 끄나풀을 찾아야 했다. 마침내 밀정을 찾아내, 그를 따돌리고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방과 마주한다. 탕탕탕! 이방이 쓰러지는 장면은 긴시간 기다렸던 단비처럼 통쾌했다. 영화는 그렇게 독립군 사람의 죽음과 공포 속에서 변주되어 나타나는 동지들 간 배신과 의리, 연민을 보여준다.
잠시 일본인 이방에 대해 알아본다. 이방은 천황친정체제를 우호하여 막부시대 종료에 힘을 보태고 기어이 메이지시대를 이끌어낸다. 천황의 총애를 받은 이방은 요직을 거치며 내각총리가 된다. 영국과 독일에성 유학한 이방은 헌법을 연구하고 일본 헌법을 세워 일본 내각제를 기초했다. 수차례 총리를 거치ㅣ며 실권을 장악한 이방은 한국을 합방하는 을사능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을사5적을 생산하고 러일전쟁을 치른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이방은 고종을 폐위하고 순종을 옹립하며 조선 조정을 사실상 뜻대로 주무른다. 이완용은 이때 핵심인물로 일본의 조선 장악에 앞장선다. 헤이그 밀사 이후 난처한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이방은 마침내 1909년 조선을 강제합병한다. 친일파들을 앞세워 조선인들을 압박한다.
이방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역국, 독일 등의 나라에서 공부한 바 있어서 각종 조약에 참여한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 재경장관과도 면담하러 하얼빈에 간 것이다. 이 기회를 타 안중근과 단지 동맹 독립군들은 이방을 암살한다. 이때가 1909년 10월 26일이었으며 이방은 안중근에게 총 3발을 맞고 죽었다.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과 독립운동가, 그리고 이들이 이방을 저격하기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시간상 제약이 있어서 그랬을까? 개연성은 다소 엉성하고 구성은 평면적이다. 안중근 곁에 함께했던 우덕순과 김상연이라는 인물은 우직과 변절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들의 우직과 변절, 죽음과 공포가 잘 설명되지 않았기에 2시간의 영화흐름을 간간이 방해했다. 하지만 극 전반에 인간 독립군, 사람 동지들 그리고 어두운 현실은 잘 배치되었다. 우덕순이 밀정인 김상현을 죽이지 못한 점, 안중근이 김상현이라는 밀정을 죽이지 말라고 한점, 일본군 포로를 죽이지 않았다고 반발한 독립군 동지 이창섭 장군이 목숨을 걸고 동지들을 도망치도록 엄호사격을 하다 현장에서 고결하게 죽는 장면,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다 술에 빠져 현실도피증에 빠진 전직 독립군, 남편을 여의고도 독립군을 돕는 강한 여인 모두가 형형색색 약하고도 고결한 인간이었다. 그저 망국인으로 외국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며 고달픈 나날을 산 사람들이었기에 실수와 배신, 의심과 신뢰, 의지와 나약함이 시간과 사람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 모든 비참한 현실을 이겨낸 의인들이었다. 이런 망국이라는 어둠 속에서도 안중근과 독립군은 이방 저격에 성공한다. 장군 안중근은 뤼순감옥에 수감되었지만, 만민법에 따라 생포된 포로로서 대우해주기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역시나 듣지 않았다. 살인자 혹은 테러리스트라며 오히려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듬해 3월 26일 그를 살해했다.
독립운동가는 그렇게 고통스런 가시밭길에서 깃발을 들었고 그길을 걸어갔다. 한없이 길고 어두운 길에 한점 별이되어 남은자들에게 빛이 되 주었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뚜벅뚜벅 그 길을 갔다. 얼마나 많은 밀정이 있었는지, 배신자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일본군, 중국군, 러시아군들 사이에서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조국을 지키고자 그들은 고통속에서 고뇌했다. 생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한계를 이겨내며 조국 독립의 길을 갔고 별이 되었다.
나는 이창섭처럼 적군을 처리했을까? 아니면 안중근처럼 조약이나 약속에 의거해 살려주었을까? 나는 단호히 말한다. 내가 안중근과 샅은 상황이었다면 적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약속을 상대방이 지킬 수 있다는 의지가 있을 때 성립한다. 그런데, 그 당시 일본군 중 약속을 조약을 기억하고 지킨 이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도 않았겠지.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그 당시, 일본군은 가해자였고 커다란 약탈자였고 한국인들은 압도적 피해자였다. 나는 그래서 안중근이 당시 일본군을 살려준 것을 반대한다. 이창섭 장군처럼 죽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또다른 죽음을 부르지만, 전쟁이 바로 죽임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두움 죽음의 굿판이다.
배신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친구를 사귀다보면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신을 단죄할 수 있을 뿐 배신한 사람을 박멸할 수는 없다. 죄를 단죄하기 위해 벌을 내린다. 한번 용서는 또다른 배신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을 믿고 일을 처리해야한다. 본인의 의지, 확고한 신념 이것들이 다 뭐란 말인가! 으느 때곤 먼지처럼 하찮해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신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울림이 된다. 산 자들은 죽은자들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헛되지 않음이다. 죽은자들이 살아가는 이치다. 산자들의 기억을 통해서. 이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흔쾌히 다 죽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럽고도 한없이 아름다운 것이 인간이라고 말한 한강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 개인과 집단은 다르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나약하고 힘들지만, 때로는 어려운 결정을 하고 고통속으로 걸어가기도 한다. 선택은 항상 깃발처럼 나부끼고 그 많은 깃발 중에 어떤 깃발을 손에 잡을지는 언제나 관건이다. 선택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인간들!
영화에서 안중근은 밀정과 배신자들까지 감싸안는 그런 인간을 보여준다. 이 대목을 나는 주목하고싶다. 배신자 혹은 적까지도 싸 안을 수 있을까, 과연 나라면?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본성이기도 하다. 실수 한점 없이 철저한 인간이라면 차라리 로봇이겠다. 실수하는 인간들을 다 죽인다면 그렇다면 내 주위에 몇이나 남을 것인가! 일단 나부터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별이 되기는 커녕 어둠 한점 보탤 뿐일 것이다. 나는 벌써 여러사람들과 교류하며 실수도 하고 외면도 받았다. 나도 사람들을 외면하기도 했고 용서를 한 경우도 받은 경우도 있지만 단절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내이지만, 문득문득 매우 괴롭다. 이 모습이 인간이다. 다른 류의 인간, 즉 로봇같은 인간들도 많지만 그들은 나중에 진짜로봇이 나오면 ...존재가 위태로울 것이다. 하지만 로봇으로 분류되어 함께 살아할수도. 로봇이 아닌 나는 약하지만 신의를 지키는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 한점 별이 되고자 한다. 우덕순은 실재인물, 김상현은 가상인물이라고 했다. 얼마전 상영된 시사기획 '창'을 보면 우덕순의 친일기록을 찾아내 보였다. 아아!!사람 속은 천가지 갈래길 보다 모를 길이라지만 역사를 사는 후대는 이것만은 명명백백하게 가려야하지 않을까? 누가 독립군이고 누가 밀정인지는 밝히는 연구 말이다. 독립군과 밀정은 손바닥을 뒤집 듯 그런 가깝고도 닮은 사이는 아니다. 지구끝에서 저 끝만큼이나 우주시작과 끝만큼이나 먼 거리이며 결코 닿을수없는 시간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부디 어정쩡하게 묻어가게 할 수는 없다. 반드시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할 후대의 숙제다.
거리에 응원봉이 넘쳐난다. 우리나라 별들이 한남동과 여의도에 전국각지에 모여있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밝히는 사람들이 모여 노래는 부른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어둬졌다가도 곧 빛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독립운동하던 때보다는 덜 어두운 때니깐 조금만 노력하면 될 것이다. 더 쉬운 문제를 풀고 있으니 좋은 점수가 나올것이다. 통탄할만한 기막힌 현실이지만 우리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우리곁에 반짝이는 별들을 그 빛들을 보며 그들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지금 우리는 영화 '한남동'을 찍고 있는 셈이다. 감독은 역사, 등장배우는 응원봉을 흔드는 빛의세력과 계엄 내란수괴와 그를 옹호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현재도 영화는 계속 제작 중이다. 이민족도 아닌 같은 민족들끼리 이렇게 적이 되다니. 어둠의 세력이 하루바삐 밝은 빛의 세력에게 내란세력이 쫓겨 물러가는 해피앤딩이 되기를 간곡히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