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리 Oct 15. 2024

소수자로 살아보는 경험

내가 나고 자란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을 경험해 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귀중한 경험이다. ‘귀중하다’라는 것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텐데 지금까지는 나는 이를 ‘경험의 확장’ 정도의 넓은 의미로만 생각했다. 다른 문화를 접하고 다른 나라 사람을 직접 만나면서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프랑스어권 국가에서 짧게 혹은 길게 살아본 친구들과 가깝게 지낸다. 나는 친구들과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공유할만한 것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들과 대화를 더 편안하게 그리고 재밌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소수자로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보통 우리는 한국에 살고 있으므로 ‘모국어 구사자’, ‘내국인’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는 즉시 우리는 ‘그 나라 언어의 비모국어 구사자’,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소수자가 된다는 경험은 본인이 다수자였을 때에 겪어보지 못할 많은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우선 사람들이 하는 말의 전부를 알아듣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항시 모든 상황에서 긴장하며 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총력을 가해야 한다. 특히나 언어능력이 내가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행정 절차 은행에서 계좌 개설, 이민국에서 비자 연장 등을 잘 마칠 수 있을지를 결정짓는 상황이라면 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약속 전 미리 관련 용어를 숙지하고, 최대한 예의 바르고, 착해 보이려고 애쓴다. 나는 이미 나의 부족한 언어 실력으로 상대를 번거롭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예의 바르고 착해 보여 이렇게나마 상대방의 번거로움을 상쇄시켜 주길 바라는 것이다.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갔던 첫 몇 개월은 일상생활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대화를 이어갔다. 한 번은 몸살에 걸려 콧물이 줄줄 나고 근육통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내가 누워있으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약국에 가서 내 증상을 어떻게 프랑스어로 설명하지?’였다. 끙끙 앓아누워있으면서도 나는 당시 사전으로 ‘콧물이 난다.’, ‘열이 있다.’, ‘근육통이 있다.’라는 표현을 찾아 쪽지에 써서 약국 상황을 대비할 준비를 했다. 덕분에 새로운 표현은 배우게 되었지만 몸도 아픈데 그 증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능력이 없다는 것까지 더해져 조금 더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또한 외국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잘’은 모르는 소수자가 되기 마련이다. 프랑스에서 석사 공부를 하던 시절, 한 학기 동안 NGO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NGO이고, 본부였기 때문에 외국인은 많지 않았다. 얼핏 생각하면 외국인으로서 업무적으로 잘 수행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인턴을 하는 6개월 내내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동료들 간의 수다에 끼어들기였다. 이는 단지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나는 이미 프랑스어권 국가에서 업무를 했던 경험이 있었고, 프랑스어로 수업을 수강할 만큼의 언어가 능숙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게 수다가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프랑스에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문화적 요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국 공통으로 월요일에 출근하고 동료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질문은 ‘주말에 뭐 했어?’이다. 이 주제가 나는 유난히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동료들이 공유하는 주말에 ‘한 일'에 대해서 프랑스인이면 익히 알고 있을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동료가 ‘나는 A도시에 놀러 갔다 왔어.’라고 하면 자연스레 다른 동료들은 ‘아 거기 그 음식이 맛있다는데 먹어봤어?’ 아니면 ‘거기 그 교회가 유명하다던데 가 봤어?’라고 꼬리 질문을 한다. 하지만 난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듣기만 할 뿐 대화에 끼기 어려웠다. 한국으로 치면 누군가 ‘주말 동안 정동진에 다녀왔어.’라고 한다면 ‘해산물은 많이 먹었어?’ 혹은 ‘해돋이 봤어?’와 같이 저절로 궁금한 것이 생기듯 말이다. 이는 ‘정동진'이라는 지역명 알아들었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과 너무 다르게 생겼다는 점이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프랑스에는 한국보다 훨씬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나와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다수는 백인이다. 석사 시절 수업을 듣느라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더러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아시아 사람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 자신조차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놀라는 자신을 보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머리로는 나는 ‘아시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내가 나의 생김새를 보는 시간(고작 아침 준비하면서 거울을 보는 20분 정도)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김새를 보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응당 백인과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고도 이렇게나 다르게 생겨서 놀랄 정도라면 프랑스 사람들은 얼마나 내 생김새가 낯설까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언어와 문화는 그 나라에 오래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다수에 스며들 수 있다. 언어는 열심히 공부하고, 문화도 경험하고 배우면 될 일인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겼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 사는 기간 동안만큼은 내가 소수자라는 점을 원하던 원하지 않던 상시 자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소수자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소수자로 산다는 것이 불편하고 이따금 서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이 편하다. 나의 나약하거나 불안정한 점까지도 공유하면 어느 정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한 번도 소수자로 살아보지 않았다면 기꺼이 인생의 한번쯤은 소수자로 살아보길 권한다. 그래서 소수자로 사는 게 이따금 서러울 수도 있음을 느껴보길 권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업, 시위 그리고 목소리 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