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미 Apr 18. 2024

가난과 우울증 치료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49

스트레이는 일리노이 주의 지원을 통해 무료로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청 후 지원을 받기까지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실업급여를 거부당한 일로 미국의 공공복지를 전보다도 더 불신하게 되었던 스트레이는 실제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버스로 10분 거리의 진료소에서 매주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전화 상담도 가능하다. 처방전도 받을 수 있다.


다만 처방받은 약을 실제로 약국에서 구입할 돈은 주에서 지원되지 않았다. 대신 메디케이드Medicaid에서 받게 될 예정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때 실시되기 시작해서 소위 오바마케어라고 불리는,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 보조 프로그램이다.


메디케이드 가입 승인은 정신과 진료 지원보다 더 오래 걸렸다. 메디케이드가 없어서 약을 구입할 수 없는 동안은 상담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의사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개인 상담, 한 번은 그룹치료를 받도록 제안했다. 남에게 속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을 꺼리는데다 우울할수록 타인과의 교류를 피하는 스트레이는, 그룹치료에 참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 듯했다.


- 남한테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힘들어. 어떻게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라는 거야?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생각을 했다. 비싼 상담사에게 정식으로 상담 치료를 받았을 때보다, 무정부주의 코뮌(생활 공동체)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했을 때 더 큰 효과를 느꼈다는 스트레이의 경험담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 그룹치료에 가면 너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지도 몰라.


내 말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트레이는 그룹치료를 받아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그룹치료에서는 스트레이에게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줬다. 한 달 가까이 스트레이는 그룹치료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른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참가자는 열 명을 조금 넘는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이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트레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규모였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지금 기분은 1점에서 10점까지 중 몇 점에 해당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한다. 단순한 형식이지만 그렇게 각자 이야기하다 보면 화제가 점점 가지를 쳐서 그룹 전체가 대화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꽉 찰 때가 많다.


가난한 동네, 게다가 스트레이가 태어난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진료소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스트레이와 비슷한 경험 또는 상황을 자주 이야기한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룹치료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했던 스트레이는, 몇 달이 지나고 나자 개인 상담보다 그룹치료를 오히려 더 좋아하게 되었다.


클리닉은 버스를 탈 돈이 있을 때는 10분 거리이지만 돈이 없어서 걸어갈 때는 40분 거리다. 미국의 교외 지역이 대체로 그렇듯 보도 없이 찻길만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고, 그런 곳에서는 달리는 차들 옆을 최대한 조심하며 걸을 수밖에 없다. 시카고 특유의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더욱 고역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잔돈을 구걸해 보기도 했지만 가난한 동네라서 다들 잔돈이 없었다며 스트레이는 웃었다. 미국에서는 교통체증이 심한 극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주로 빈곤층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미국인 친구들의 말로는 전철보다도 버스가 더욱 그렇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물어보자 잘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스트레이가 사는 지역의 버스 기사 중에는 승객들의 가난을 이해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짜로 태워 주는 사람들이 있다. 스트레이도 여러 번 신세를 졌다. 물론 아무리 사정해 봤자 소용없는 기사들도 많다.


스트레이는 면허증이 만료되어 운전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돈을 마련해서 면허증을 갱신한다 해도 어머니가 차를 빌려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빌려준다 해도 기름 값이라는 명목으로 실제 기름 값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이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같은 방향으로 외출할 일이 있을 때조차 스트레이를 태워다 주기를 거부한다. 스트레이는 구멍 난 신발을 신은 채, 눈이 무릎까지 쌓인 상태로 방치된 바깥쪽 차선을 걸어서 상담을 받으러 간 적도 있다.


항우울제는 메디케이드에 가입된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아직 처방받지 못했다. 스트레이가 항우울제를 사용하다가 이인증이라는 심한 부작용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담당 의사가 처방을 꺼리고 있다. 스트레이도 항우울제로 우울증을 완화하고 싶기는 하지만 만약 이인증이 다시 일어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한다.


상담을 받지 않는 날에는 집 안팎의 고양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 도서관에 가기도 하고, 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많이 자고, 어떤 날은 불면증 때문에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채로 게임을 하거나 넷플릭스를 본다. 스트레이는 수면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의사는 수면제의 처방도 꺼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집에 살기 시작한 후로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리듬에 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수입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고, 사이가 나쁜 가족에게 얹혀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결코 편안한 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증 우울증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나는 스트레이가 예전보다 눈에 띄게 감정기복이 줄어들고 온화해졌다고 느낀다. 아마 술을 거의 끊은 덕분일 것이다.


스트레이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가족이나 친구가 술을 마실 때 한 잔 함께 마시는 것 외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술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 것은 십대 때 이후로 처음이라고 한다.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우여곡절 끝에 금주를 시작했고,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재발을 막아 주고 있다. 십대 때 독립한 후로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술을 마시는 습관이 생겼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 스트레이는 술 자체에 대한 갈망은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피곤해도 불면증 때문에 잠들지 못할 때, 예전처럼 술을 마셔서 기절하듯 잠들고 싶다는 충동은 꽤 강렬하게 느끼는 듯하다. 나는 스트레이가 하루빨리 가족의 냉대에서 벗어나 다시 독립할 여건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면 혼자서 술을 마시는 습관이 다시 돌아올까 걱정되기도 한다. 충동을 억누르든 충동을 따라가든 그 과정과 결과는 결국 스트레이의 몫일 것이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차가운 집과 따뜻한 고양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