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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외고 입시가 말이야

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4

by 이정미

나 때는 서울에 있는 외국어고등학교들이, 지금보다 훨씬 들어가기 쉬웠다. 중학교 3학년이 되기 전부터 외고를 목표로 삼고 성적을 관리하는 일은 드물었다. 외고 입시를 전문적으로 준비하는 학원도 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내가 다닌 중학교와 그 주변 동네에서는 그랬다. 그런 우리 중학교에서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의 외고 합격자가 나왔으니, 다른 중학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외고 입시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이 되고 고등학교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끼리 모여 있는 학교라면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에 더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외고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외고에 대해서는 중학교 내신 성적과 영어 듣기 시험으로 입학을 결정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외고 대비 문제집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엄마가 적당히 골라 온 영어 듣기 문제집 한 권을 대신 풀었는데, 나한테는 너무 어려워서 항상 절반 가까이 틀렸다.


다행히 실제 입학시험은 그 문제집보다 훨씬 쉬웠다. 면접 같은 것도 없었고 영어 듣기 한 과목만 보고 나오면 끝이었다. 1차 전형과 2차 전형도 따로 없었다. 지원 서류를 낸 모든 학생이 영어 시험을 보고 나면, 서류와 시험을 함께 심사해서 한 번에 통보하는 방식이었다. 중학교 내신은 백분율 기준이었다. 전교 5퍼센트 안에 들면 합격을 기대해 볼 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 시험은 형식적이었고, 서류 심사를 통해 각 중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뽑아오는 일이 진짜 목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들어간 외고에는 일곱 개의 외국어 전공이 있었다. 지원 서류에 전공을 1지망부터 7지망까지 쓰도록 되어 있었다. 일단 합격자는 학교 전체 정원만큼 뽑고, 그 후 입학 성적이 좋은 학생부터 지망 전공에 배정하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어를 배우고 있던 나의 1지망은 당연히 일본어. 2지망은 남들이 흔히 배우지 않는 언어라서 호기심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스페인어. 일본어는 인기 있는 언어였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고, 나는 그 경쟁에서 밀려 스페인어를 전공하게 되었다.


비록 외고가 지금만큼 치열하지는 않았어도, 외국어를 배우러 외고에 왔다는 아이는 나 때에도 이미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다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찾아서 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공부가 모든 일의 기준이었다. 입학 성적순으로 전공을 배정했기 때문에, 인기 있는 전공일수록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과가 우리 학교의 꽃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과는 중간이고, 스페인어와 러시아어과는 별 볼일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우리 스페인어과 아이들은 처음에는 “스페인어가 앞으로 잠재력이 있대.” 라고 말하면서 기운을 냈지만, 한 학기 정도 지났을 때는 그냥 포기하고 우리가 별 볼일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스페인어는 아직까지도 잠재력만 있는 언어인 것 같다) 러시아어가 조금 더 소외된 전공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심지어 선생님들도 그런 말을 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과는 야간자율학습을 열심히 한다. 스페인어과는 대부분 도망가고 조금밖에 안 남아 있다. 러시아어과는 야자가 끝나기도 전에 다들 교실 불까지 끄고 집에 간다.’


과에 따라서 아이들의 경제력도 차이가 났다. 집이 부자일수록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모인 전공에는 분명 부잣집 아이들이 좀 더 많았다. 일본어과에서 생일을 맞은 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 10만 원짜리 옷을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200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큰 돈이었으니까.


대학교 시간강사여서 여름과 겨울에는 수입이 없었던 아빠와 학습지 교사 일로 가족을 부양했던 엄마는 내가 외고에 합격했을 때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내가 외고라는 상류사회의 삶을 따라가지 못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일본어과에 들어가지 못한 덕분에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 과에도 부잣집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는 아이도 있었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이불집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 서울의 외고들이 어떤지 나는 잘 모른다. 나 때처럼 넉넉한 집 아이가 아니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일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외고 입시가 그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면 게으른 나는 결코 외고에 들어가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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