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10
2000년대 중반, 연세대학교에 들어간 첫 학기부터 나는 엄마의 강력한 권유로(거의 등을 떠밀려서) 연세대학교 외국어학당에 영어회화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옛날 눈높이영어 때와 마찬가지로 ‘영어는 많이 공부해 둘수록 좋다’는 이유가 첫째였다. 거기에 ‘연세어학당은 일반 영어학원보다 훨씬 까다롭게 교사를 뽑기 때문에 수업의 질이 높다’는 이유도 있었다. 나도 일기장에 지금은 개성시대이니 모두가 영어를 잘 필요는 없다고 썼던 어린아이가 더 이상 아니었다. 아직 영어에서 재미를 느낀 적은 없었지만,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어학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학기는 계절마다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어학당 봄 학기 수업을 들었지만, 그렇게 해 보니 좀 힘들어서 그 후로는 방학 때마다 여름과 겨울 학기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가장 쉬운 레벨 1부터 가장 어려운 레벨 9까지 나뉘어 있었고, 또 대학생반과 일반인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처음에 간단한 회화 시험을 봐서 레벨을 결정하고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은 다음, 기말시험을 통과하면 다음 레벨로 올라갈 수 있었다.
레벨 시험은 간단한 일상적 대화, 그리고 그림을 보며 영어로 묘사하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뜨개질을 하는 아주머니 그림이었는데 그 때는 ‘뜨개질하다(knit)’라는 간단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아서 잠시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난다. knit이라는 영어 단어를 먼저 주고 무슨 뜻인지 말해 보라고 하면 당연히 금방 말했겠지만, 그 반대 방향은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배정된 레벨은 4였다. 나중에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레벨 4에서 시작한 사람이 가장 많고, 3과 5도 좀 있던 것 같았다. 나는 딱 평균이었던 셈이다. 내가 외고를 졸업했다는 것을 생각하면(영어 전공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썩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기말시험에서 떨어진 적은 없어서 그 후로 한 레벨씩 꾸준히 올라갔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모두 미국에서 온 백인이었다. 수업에서는 선생님과 학생 모두 한국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교재도 모두 영어권 국가에서 수입해 와서 전부 영어로만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문법 숙제가 항상 나왔다는 것이다. be 동사를 인칭과 시제에 맞게 바꾸기와 같은 쉽고 반복적인 문법 문제였다. 마치 눈높이영어를 다시 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지루한 숙제였지만 필요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아는 문법도 말을 할 때는 틀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선생님이 문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어만 알아서는 소용이 없고, 그 단어를 끼워 넣을 문법이라는 뼈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명의 선생님이 한 학기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쳤다. 선생님에 따라 수업 방식이 어느 정도 달랐다. 수업은 대체로 알찼지만 가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선생님이 주제를 주면 학생들끼리 서너 명씩 조를 이루어 영어로 이야기하는 일이었는데, 레벨 5에서 만난 선생님이 특히 많이 쓴 방법이었다. 선생님이 조마다 돌아다니면서 대화에 끼기는 했지만 우리끼리 콩글리시만 주고받다가 끝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콩글리시를 고쳐 줄 사람이 없으니 그 다음 시간에도 발전 없이 똑같은 콩글리시를 썼다.
그래도 열심히 영어를 가르쳐주고 고쳐주는 선생님이 더 많았다. 내가 아직까지 이름을 기억하는 선생님이 한 명 있다. 레벨 4와 7에서 두 번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개성도 가장 강했고 수업도 가장 열성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J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머리를 밝은 빨간색으로 물들여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타고난 머리색도 붉어서 어릴 때 별명이 당근이었다고 하는데, 그 별명이 싫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특징을 더욱 살리기로 한 모양이다. 양쪽 팔에는 빽빽하게 문신이 있었다. 대부분은 군대에 있을 때 한 것이라고 한다. 항상 흰색 긴팔 셔츠를 입었고, 한여름에도 특히 실외에서는 절대 소매를 걷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문신을 안 좋게 볼까봐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도 더 큰 이유는 문신을 햇빛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자외선을 가능한 한 피해야 문신이 오랫동안 선명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살면서 남의 문신을 가까이에서 본 일 자체가 처음이었던 내게는, 그런 문화 차이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열성적인 선생님을 만나도 우리의 수업 태도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외고 시절 영어회화 수업만큼 비협조적이지는 않았지만, 의욕이 부족하고 묻는 말에만 간신히 대답한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친절하고 쾌활한 J 선생님도 우리의 태도에는 몇 번 불만을 표시했다. 일반인반에서 환갑이 넘는 사람들도 가르쳐 봤는데 그 사람들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너희는 나이도 어린데 왜 그러느냐, 라는 요지의 말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오히려 다들 낯을 가리고, 쑥스러워하고, 서로 눈치만 봤던 것 같다. 또 다들 영어를 배워 두면 나중에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왔을 뿐, 구체적인 동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순전히 의무감 때문에 다닌 것에 비해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나 스스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수업을 따라갔다. 레벨 8까지 올라가자 어느 정도 걸러진(?)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수업 태도가 좀 더 능동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높은 레벨은 수강생이 적어서 일반인반과 대학생반이 통합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수강생들은 확실히 수줍음을 덜 탔다. 수업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레벨 9까지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레벨 9는 수강생이 너무 적어서 새벽반밖에 개설되지 않았다. 아침잠이 많은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보다도 더 아쉬운 점은, 불과 2~3년 후 나는 영어에 그전보다 훨씬 많이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 때 어학당에 다녔으면 배우는 것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시기가 맞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학당에서 영어를 많이 배워 둔 덕분에 영어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고, 그래서 그 후 영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어학당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