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9
외국어고등학교 시절, 같은 스페인어과 친구 두세 명과 함께 학교 앞 비탈길을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다 같이 집에 가고 있었으니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제과점 하나가 번쩍번쩍한 새 간판을 단 것을 발견했다. 간판에는 ‘SHILLA’라고 쓰여 있었다.
“야, 어떡해……. 가게 이름이 왜 저래?”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발음이 예뻐서 썼나봐. 스펠링도 틀렸어.”
“들어가서 무슨 뜻인지 말해 줘야 되나?”
우리는 발걸음까지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수군거렸다. ‘Shilla’에서 한 글자를 뺀 ‘silla’가 스페인어로 의자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발음은 유럽 스페인어에서는 ‘실랴’에 가깝고, 중남미 스페인어에서는 ‘시야’에 가깝다.
그래도 잠깐, 의자 제과점이라니? 철자도 하나 다른데? 애초에 정말 스페인어이기는 할까? 이상하다고 느낀 나는 한동안 생각한 끝에 마침내 수수께끼를 풀었다.
“저거 ‘신라’제과잖아!”
그전까지 신라명과 매장들은 한글로 된 간판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Shilla라는 영어 표기가 낯설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다 같이 스페인어라고 믿어 버리다니. 만약 우리가 정말 그 가게에 들어가서 Shilla가 아니라 silla라고 써야 맞다고, 그런데 silla는 의자라는 뜻이라고 설명하려 들었다면 점장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명색만 스페인어과지 스페인어에 특별히 공을 들이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래도 전공어 수업이 꽤 많다 보니 우리는 나름대로 몰입한 상태였던 것 같다. 스페인어와 비슷한 단어만 보면 맥락과 상관없이 곧바로 스페인어라고 확신할 정도로.
외고에 다니는 동안에만 해당됐던 이야기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스페인어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도 졸업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스페인어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문법은 물론이고 쉬운 단어들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3년 동안 배웠던 언어, 한때는 신라명과를 의자명과로 오해할 만큼 공부했던 언어이니 전혀 배우지 않은 것보다는 당연히 낫다.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외국어도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특히 실감한 것이 몇 년 전 스페인 여행 때였다.
스페인 남부는 관광산업이 발달한 곳이어서 스페인어를 몰라도 대체로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나는 미리 스페인어를 조금 복습해 가서 인사말이나 간단한 질문을 말해 보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현지 분위기를 더 잘 느껴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 정말로 필요해서 스페인어를 썼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유일한 예외가 생겼다. 마지막 여행지인 그라나다에서 18세기 저택을 개조해 만든 멋진 숙소에 묵을 때였다. 프런트를 지키는 사람이 총 세 명, 하루 3교대로 한 번에 한 명씩 일하는 모양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시간대에 따라서 영어를 잘 하는 정도가 달랐다. 체크인이 많아서 새로 온 손님들에게 설명할 내용이 많은 오후에는 영어가 유창한 사람. 체크인이 적은 저녁과 밤에는 기본적인 영어만 통하는 사람. 체크인이 거의 없고 드나드는 사람 자체가 적은 새벽에는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사람이었다.
일정 때문에 이른 새벽에 호텔을 떠나느라,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직원과 소통을 해야 했다. I’m sorry라는 아주 간단한 영어조차 하지 못하는 아저씨였다. 선불로 예약한 덕분에 다행히 체크아웃은 아주 간단했다. 문제는 택시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스페인어로 질문하고 스페인어로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택시는 어디서 탈 수 있나요?”
다행히 여행 전에 공부한 범위 내에 있는 질문이었다. 그럭저럭 머릿속에서 조립해서 입 밖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 건물 앞까지는 택시가 잘 안 오고, 저기 광장 알죠? 광장까지 나가세요. 택시가 올 때는 광장을 한 바퀴 돌아서 들어올 거예요.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타면 돼요.”
전부 스페인어였다. 그리고 나는, 전부 알아들었다!
저 내용을 내가 스페인어로 다시 말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나오는 단어들의 반에 반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스페인어로 말했을 때는 큰 문제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광장에 나가서 한 바퀴 돌아 들어오는 택시를 금방 잡아탔으니, 착각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았다.
어린아이가 모국어를 배울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먼저이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라고 하는데, 외국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흔히 ‘말하기‧듣기’라고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지만 말하기보다 듣기가 훨씬 쉽다. 그리고 내 생각에 듣기는 가장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인 것 같다. 머릿속 구석구석에 파묻혀 있던 지식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려 나와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 학습의 단계를 직접 체험했다는 측면에서도, 거의 잊어버린 줄 알았던 언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는 측면에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여행이 끝난 후로 스페인어는 다시 완전히 놓아 버렸으니 이제는 똑같은 말을 다시 들어도 아마 알아듣지 못할지 모른다. 스페인어 다시 배워 보고 싶다, 오늘도 그렇게 생각만 한다.